[길위의 미술관]
제미란
이프, 2007년 10월
필자 제미란은 어느날 보따리를 쌌는가보다. 그리고 길을 나서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그림과 작가를 만나고, 눈물 콧물 훌쩍거리며 밤새 수다를 떨고 회포를 풀었단다. 그 여정이 가진 의미를 좀 번듯하게 정리하자면 필자에게 그림을 보러 떠나는 일은 ‘순례’의 여정이자 여행자를 위한 "치유"의 과정이었고, 그리고 그 여정을 이 책에 담았단다.
그런데 그림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사실 평범할 수 있다. “길에서 쓴 그림일기”인가하는 책도 그렇고 뭐 ‘길’과 ‘화가’, 혹은 ‘길’과 ‘문학’을 짝 짓는 일은 ‘결혼중매업’만치 ‘통속적’이다. 자칫 제목만으로는 통속이라는 늪에 빠질듯 위태롭던 이 책이, 독자인 나에게 이필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여성미술 순례’라는 소제목이다.
좀 어거지로 느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림과 작가가 다름 아닌 “여성”이란 사실은 이 시대, 우리에게 뭔가 특별한 데가 있다. ‘계급’이라는 화두가 잠복하면서 ‘여성’과 ‘환경‘이 시대정신을 담는 화두로 급속히 대체되던 시대를 청년으로 살았고, 그 열정으로 나머지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세대가 바로 필자 그리고 독자인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뭇 싱겁게 끝나 버릴 수 있었던 ‘이산가족 상봉’이, 필자와 필자가 만난 작가와의 사이에 ‘여성’이라는 공통성에 기반 한 정서적 공감대 혹은 세계관이 있어 이토록 애절하고 신파적인 감동을 줄 수 있게 한 것이 아닐까 감히 짐작해 본다. 하지만 도대체 그 “여성”의 삶이라는 공통성이 뭐길래, 도대체 그 “여성성”이 갖는 세계관의 차이가 뭐길래 사상적 동지를 만난듯 필자와 작가는 그토록 애절할 수 있었을까?
참 많은 여성 작가의 구구절절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필자가 명시적으로 “여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보질 못했다. 오히려 필자는 작가와 그림을 마주한 개인적 소회와 ‘사적인 대화’를 통해 그 ‘여성성’을 구현해 내고 있는 듯했고, 그것을 읽어 내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은 듯했다. 그래서 더 ‘여성’적 글쓰기에 성공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또 하나, 독자는 호기심 하나로 필자의 생채기를 들여다 본다. 방관자의 특권일 것이다. 나는 필자의 ‘언어장애’를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충돌에서 빗어진 ‘개인’의 좌절로 읽었다. 필자는 한 특수한 시기의 삶이 가졌던 규정성에 의해 침묵이 강요되었던 자신의 정신적 고통 혹은 상처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치유과정의 설득력이, 치유를 필요로 했던 상처의 ‘우연성’에 의해 손상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일까? 동일한 시대 동일한 상황에서 비슷한 ‘증상’으로 고통 받닸던 기억이 있는 독자로서 필자에게 말을 걸고 싶다.
그토록 절실했던가? 스스로의 삶의 진정성에 그만치 충실했던가? 시대를 탓할 만치 우리는 당당한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뭐 시간이 흐른다고 알아질 문제도 아닐 것이다. 길에서 만나 작가들의 크기에 비해 필자의 고뇌는 너무 작은 것이 아닐까? 아니 그러한 나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닐까? 세상에 위대한 삶은 따로 있을지언정, 크기가 작은 삶, 가치가 작은 삶이 따로 있진 않을 것인데, 개인에게 사적인 고뇌는 세상의 전부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렇듯 이 책은 나같은 나태한 독자에게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귀찮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게으른 독자를 책 속에 빠져들게 하는 마력은 엉뚱하다. 책속에서 미술, 특히나 여성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인 내가 잘 잡히지 않는 갈피를 찾아 헤메다 문득 자신의 지난 시절 기억과 내면의 알리바이를 추적하고 있는 스스로를 섬짖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한번 더 읽어 봐야겠다.“
필자가 길에서 만난 니키 드 생팔, 키키 스미스, 루이 브루주아 등과 그들의 대표작들은 겨우 한두번 인쇄매체나 전자매체에서 마주한 것이 고작인 무식한 독자인 내가 필자 나름의 작가론이나 작품론이라 할 수 있는 해석과 의미부여에 대해 구구절절 토를 달거나 평가할 자질도 이유도 없다. 그냥 새 세상을 알아가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낯선 대양을 항해하는 초보 항해사의 어설픈 설레임과 괜한 호기 아마 그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졌던 지적, 정서적 반응의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미술’ 바깥 세상을 살아가는 나는 팔자에 없던 낸시 스페로와 낸 골딩과의 교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을 친절한 필자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책을 통해 적어도 나의 무미건조한 삶에 삶이란 얼마나 구구절절한지, 그리고 치열하고 진실해야 하는 건지, 그리고 남성과 다른 여성의 삶은 떠 얼마나 다르게 절실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는데 이는 다름아니라 미술 역시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자기 표현의 한 양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끝났지만, 아마 필자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독자인 나는 책을 덮었지만, 그 여정의 동반자로서 여전히 길 중에 서 있다. 그리고 긴 여정을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계속할 할 것 같다. 그리고 필자와 필자가 만나 작가와 긴 인생의 도반이고 싶다.
나는 이책이 많이 팔리면 좋겠다. 필자 제미란의 글맛을 두루 나누어서 좋고, 여성과 여성 작가에 대한 세상의 이해가 넓어져서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미란은, 모든 독자가 만나서 와인 한잔 사 달라고 졸라 긴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 싶은 그런 필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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