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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빼어난 스승이라 불러도 좋을 도법 스님과 김용택 시인의 필담과 대담을 묶은 [시인과 스님, 삶을 말하다]는 쉽게 읽고서, 어렵게 덮어야 하는 이상한 책이다. '뭐 다 좋은 이야기이긴 한데... 그래서?'라고 '인상비평' 한 줄로 다 읽은 책을 덮어버릴 찰나, 왠지 모를 울림이 가슴에 남아 책을 덮던 손을 멈춘다. 쉬 책을 손에서 놓질 못하고, 그리고 계속 읇조린다.'그런데... 그런데...' 그리곤 다시 책 여기 저기를 뒤적이기 시작한다.

이 책은 두 분의 삶을 시간의 질서에 따라 서술해 나간다. 그것은 두 분의 철학이나 사상의 근저를 추상적 이론의 구조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삶의 궤적 속에서 도출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시인의 삶과 스님의 삶은 출발부터 달랐다. 두 분의 삶을 가른 출생의 조건은 한 분을 시인으로, 또 한 분은 스님으로 키웠다. 여기서 '키웠다'는 것은 두 스승의 독자적 위대성이 아니라 역사의 자식, 세상의 자식으로서의 두 분의 사회적 존재성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시인 김용택의 삶과 도법 스님의 삶은 출발부터 지금의 도정까지 겹치는 부분이 없어 보인다.

시인 김용택은 저 푸른 초원 위에 뛰어 노는 사슴을 노래하는 그런 뜬구름 잡는 시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시인은 '전사'의 김남주와 같이 역사의 현장, 가치와 가치,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시대의 접점에서 처절한 혁명투사의 삶을 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시인은 가난해서 평화롭고, 단촐해서 아름다운 단아한 농촌마을공동체의 따뜻한 울타리 속에서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행복의 근저를 들여다보면서 자랐다. 그것을 시인은 '마을정신'이라 이름 붙이고,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원리로 제시한다.

도법 스님은 지옥보다 더한 살육의 현장에서 나서 자라고 그리고 출가했다. 출가로부터 스님을 사로잡은 화두는 죽음과 고통이었는가 보다. 죽음이란 화두를 잡고 구도하고 정진하는 도법스님의 수행과정은 철저히 내면적이고 어쩌면 비인간, 탈인간적이기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도법의 발걸음은 토굴이나 골방이 아니라 인간 삶의 현장을 향했다. 그는 세속을 등진 선문답이나 고행이 가져온 고통의 끝에서 다시 세상의 진상을 확인하길 원하는 그런 선승이 되지 못했다철저히 현실적 삶, 현실적 존재조건 속에서 뭇 생명의 구원을 추구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다르지만 아름다운 두분의 삶이, 그리고 생각의 끝이 어긋난듯 교차하고, 갈린 듯 머주치며 결국은 왠지 서로 합일할 것 같다.

시인은 '마을'에서 구원의 빛을 찾았고, 스님은 또 뭇생명의 공동운명체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았다. 그 순간 시인은 스님이 되고, 스님은 또한 시인이 되었다. 인간공동체-마을이라는 진흙탕속에서 연꽃을 피우기를 갈구하는 두 분의 구도는 시적 세계의 극이 바로 극락이고, 구도의 완성태는 곧 시적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라는 큰 깨달음에 도달했다. 시적 세계의 극치는 극락과 다르지 않고 극락 또한 시적 아름다움의 구현체가 아니겠는가!

이 책의 기획자가 두 분의 필담을 통해 모색하고자 제시한 과제는 ‘시대진단대안 모색이란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시대의 길' '제대로 된 삶' 얻기 위한 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지평에서의 인식을 두 필자에게 요구하는 듯 보이고, 이 과제에 대한 두 분의 화답은 단순 명료하다.

스님은 말한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철학, 종교, 윤리, 가치, 논리를 버리고 존재의 실상에 따라 사는 것이란다. 그런데 문제는 어찌 내 같은 필부가 그와 같은 '존재의 실상'을 깨달을 수 있단말인가!

시인은 말한다마을 정신이야말로 인류가 함께 아름다운 삶을 이룰 수 있게 한다고. 하지만 그 마을 정신이 뭔지 진짜 마을에 살고 있는 난 아직 잘 모르겠다.

시인과 스님은 끝내 손에 잡히는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두 분은 구체적 사회구성원리나 정치철학을 제시하는 사상가가 아니라 차라리 사상가가 탐구의 과정에서 기반해야 될 가치의 지평을 여는 구도자로 남는다. 그래서 갑자기 묘연해진다.

누구나 세상을 진단하고, 나름의 처방을 제시한. 사실 왜 아닌가, 왜 안돼는가를 묻지 않는다면 누구나 그냥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기독교의 사랑이, 불교의 자비가 무엇이고, 평등과 박애, 자유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쟁취되고 작동해 왔는가. 그리고 모든 답은 정답이고, 그렇기 때문에 또 모든 답은 오답이 아니던가? 그래서 모든 근본주의와 환원론은 공허하고 구체적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저 끈적거리고 비린내나는 권력과 금력, 지배와 욕망의 쌍곡선이 그려내는 기기묘묘한 유령의 그림자가 아니든가.

그래도 나는 책을 덮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도법스님과 시인 김용택이 꿈꾸는 세상은 멀리 있지 않다고비록 '존재의 실상'과 그에 기반한 '마을정신'을 직시할 지혜가 없을지라도 나의 내면의 욕망을 직시할 수 있는 지혜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욕망을 객관화하고 너의 욕망과 나의 욕망을 지긋한 눈으로 직시할 수 있다면, 그러면 다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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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여행이 보편화된 것이 언제부터일까?

조선시대 팔자좋은 양반들은 머슴 등에 식량과 의복을 지우고 팔도의 명승을 찾아 '유람'을 다니기고 했고, 일생에 유산록 몇편은 기본으로 남겨야 선비 소리를 들었다고한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드디어 해외여행허가제가 풀리고 88올림픽 등을 통해 외국의 문물이 물밀듯 들어오고 일반 시민들의 주머니 사정이 그래도 배를 채우고 조금 여유가 있는 수준이 되고 나서야 비로서 '여행' 특히나 '해외여행'이 보편화되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주머니 사정이 '여행'이 가능할 만치 넉넉해진 뒤에야 사람들은 너나 할 것없이 '여행'의 멋과 맛을 찾아 '단체'로 몰려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지 주머니 사정만이 보편화된 여행 풍토를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넉넉해진 주머니 사정에 반비례해 궁핍해져가는 정신, 깊어가는 존재의 목마름이 사람들의 등을 떠밀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단체 여행객이 홀로걷는 여행으로, 여행이 순례로, 관광이 치유로 바뀌는 동안 세상은 그만치 또 변했고 사람들 역시 변해 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서 쏱아지는 여행기, 여행안내서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 잡았고, 여행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의 대리만족을 위해서도, 여행을 떠날 사람들을 위한 정보제공을 위해서도 풍성한 양식이 되어 주었다.

이 책 [사람풍경]은 흔해 빠진 단순한 여행 안내서나 여행기가 아니다. 그래서 어쩌면 [사람풍경]은 변화된 시대를 앞서 구현한 새로운 양식의 여행서 인지도 모른다. 필자는 로마로 오클랜드로 피렌체로 물리적 공간 이동을 계속하지만 더불어 필자의 여정은 무의식에서 콤플렉스로, 불안에서 동일시로 이어지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의 과정이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여행지는 배경일뿐이고, 내면의 여정, 자아찾기의 먼 길을 헤멘 작가의 정신이력이 이 책의 주 테마일것이다.

'내안의 나를 찾아 떠난 여행'이라는 필자가 붙인 서문제목에서 보여지듯, [사람풍경]은 철저히 치유와 명상, 구도의 과정을 담고 있는 십우도이거나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 14처는 한단계 한단계 고양되어가는 정신의 부양을, 영적인 순례 여행을 나타내지만 [사람풍경]은 어떤 절대적인 정신의 고양단계를 향한 여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복잡하게 얼켜있는 인간 내면세계의 미묘한 감정들, 양태들을 엉킨 실타래 풀듯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게 풀어헤친 불안과 우을을 내려놓고, 자기애와 공감을 획득해 나가는 과정은 그래서 쉽게 이해되고 공감되는 편안한 책이다.

그렇다고 해도 구도의 길은 작가의 글을 통해 대리 체험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지식이나 감상의 산물이 아니다. 읽은 책을 놓고 다시금 철저히 자신만의 길로 정진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이 결국 인간 존재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책을 읽고 나면 사실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하나... '여행자'와 여행을 통해 글을 쓰는 '여행작가' 중 누가 더 깊은 여행의 맛과 멋을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일화'를 특정한 관념, 혹은 감정에 연결지어 심리적 의미부여와 해석을 하다보니 가지게 되는 작위성이 조금은 거슬린다면... 작가의 존엄을 침해하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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