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30
일은 끝나지 않았고 우리를 싣고 갈 비스타리님은 도착했다. 네팔! 5년을 기다려 온 여정이다. 출구 막힌 일상의 도피처이자 스트레스의 배출구였던 네팔행의 꿈. 드디어 떠난다. 하지만 짐도 마음의 준비도 여정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끝내지 못했다. 사과 발송을 마지막으로 집을 나섰다. 명호면 소재지에 들러 라티와 짜장면 한 그릇으로 작별을 대신하고 수원으로 향했다.
수원에 도착해서 비스타리님의 아파트에 짐을 풀고, 시내로 나와 마트에 들러 일부 준비물을 구했다. 오랜 세월 멈춰있던 손목시계의 건전지를 갈고, 3000불 환전에 대한 현금을 송금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진다. 네팔전문 레스토랑을 찾아 곧 시작할 두 달 여정의 네팔 생활을 맛보는 리허설을 했다.
16/12/31
수원집을 나와 아침부터 줄은 선다는 유명식당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영종도에 있는 처형댁에 들러 장모님을 뵙고 불편한 30분의 체류 뒤에 공항으로 향했다. 첫 일정을 같이할 5명의 일행이 하나 둘 모이자 네팔에서 기부할 약품을 여러 배낭으로 나누고 불안한 수화물 발송을 마치고 나니 오후 2시가 지났다. 내일 다시 카트만두서 재회하겠지만 상해와 쿤밍을 경유하는 낯선 길에 부디 아무 착오가 없기를 약속하며 5명의 도반은 출국장으로 사라졌다.
우리에겐 다음날 아침 8시까지 여유가 주어졌다. 어제부터 가이드겸 기사를 자청한 비스타리님도 작별을 하고, 공항철도를 타고 1시간만에 광화문에 도착했다. 봉화군농민회 회원을 싣은 버스는 아직 톨게이트를 통과중이라니 딸을 만나 식사를 했다. 딸이 주는 내복 선물을 챙기고 광장을 나가 농민회 동지들을 만나 “박근혜 퇴진!”을 힘껏 외치다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스파온에어의 잠은 깊지 못했다. 어수선한 와중에 억지로 잠을 청하며 여행이 내 삶의 또 하나의 장식물이 아니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2달간의 이번 네팔여정이 나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어떤 계기라도 가져다주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에 가슴 부풀었다.
17/1/1
아침 5시, 굳이 깨지 않아도 일어날 수 있었다. 잠을 잔 것이 아니라 그냥 밤새 누워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빵과 커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8시 40분 비행기는 인천에서 발을 뗐다. 비행은 늘 불편했다. 고소공포일까 밀폐공포일까 아니면 단순한 조갑증일까? 둘러보니 아이들은 마냥 즐거워하지만 중노년들은 다 똥씹은 표정이다. 나이가 들면 겁도 늘고 걱정도 느는가보다. 걱정이나 공포는 인간의 합리성의 증거일까 비합리성의 산물일까? 객관적으로 안정성이 높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그냥 몸이 하늘에 떠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한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시간 50분을 비행 후 푸동공항에 도착하니 현지시각 9시 45분이다. 소통이 불가능한 공무원과 입국비자로 실랑이를 벌였다. 알고 보니 출국 바우처를 요구한 거였다. 내 인생의 첫 중국 방문이니 뭐 그 정도는 감수 할만 했다. 쿤밍행 비행기를 타기에는 10여 시간이 남았지만 공항 밖 상해는 너무 멀어보였다. 청사 바깥을 걸어서 나가 보았지만 짧은 시간 상해를 맛보기에는 사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못했다. 공항내 까페와 레스토랑을 돌며 먹고 또 먹고 시간을 죽이다 간혹 비스타리님한테 받은 lonely planet NEPAL을 읽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오후 9시에 쿤밍행 동방항공에 탑승했다.
두세시간 비행뒤 쿤밍에 도착했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 운남성에서 보름 정도를 보내는 일정을 생각했었다. 두 달을 온전히 네팔여정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면서 쿤밍공항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곳이 되어버렸다. 상해 푸동공항은 아직 중국이 아니었다. 푸동공항은 여는 국제공항과 크게 다르지 않는 느낌이었다. 다양한 인종과 화려한 명품 매장들 그리고 사람들의 바쁜 발길조차 인천공항의 판박이였다.
하지만 쿤밍은 달랐다. 쿤밍에 들어와 비로소 폐부 깊숙이 중국의 냄새가 느껴졌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들은 다 중국인이었다. 특히나 무리지어 다니는 티벳탄 때문에 쿤밍은 더욱더 중국답게 다가왔다. 떼에 쩔은 옷차림과 배낭에 색동실로 장식한 머리카락은 기름에 떡져 뽀얀 먼지가 덮고 있었지만 표정은 당당했고 친근했다. 왜 티벳탄들은 하나같이 어린 시절 기억속의 이웃 아저씨 같이 편안하게 느껴질까 궁금했다. 그들은 차림으로 보아 노숙인과 다름없었지만 보무도 당당하게 현대식 공항청사를 휘저었다. 참 멋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그들 무리의 뒤를 쫏아 청사 지하의 대합실로 향했다. 그들은 따라 가는 것만으로 왠지 든든했다.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아예 이부자리를 펴고 누운 사람들로 넓은 공간이 만원이라 우리 부부가 몸을 누일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공항밖 숙소로 향하기에는 시간적 여유도 불확실했고 사실 치안도 알 수 없어 공항내 있다는 호텔을 찾을 수 없었다. 어렵게 찾은 잠자리 대안으로 발마사지 가게를 발견했다. 겨우 와이프만 발마사지 가게에 몸을 누이고 나는 구석진 복도에 담요를 깔았다. 결국 이번에 실현할 계획이 아니었던 찌질한 나의 버킷리스트중 하나인 공항노숙을 실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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