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여전히 창밖은 흐리고 가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미련없이 하산하기로 마음먹고 잠을 청했지만 막상 아침을 맞았는데도 상황이 변화된게 없어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다이님 룸에 모인 트레커들 역시 어제 올라온 한국인 남성 한분만 빼고 모두 하산을 결정한 상태다. 티벳탄 브레드를 먹고 룸으로 돌아와 하산을 위해 배낭을 꾸렸다. 예티호텔을 나서니 차메에서 동행했지만 다른 숙소에서 지내게 된 한국인 여성분은 기상이 좋아질 때까지 하루이틀 더 기다려 보겠다며 남으시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다시 순간적으로 멈짓거렸다. 하지만 마낭에서 이삼일 지체하다 결국 쏘롱라를 넘지 못하고 하산을 하게 되면 안나푸르나 라운드뿐 아니라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코스조차 시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다시 자라는 미련의 싹을 잘랐다. 서로의 행운을 빌며, 그리고 큰 아쉬움과 또 하나의 삶의 과제를 안고 뒤돌아섰다.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지만 살아생전에 꼭 한번 다시 쏘롱라를 찾아야만할 것같은 과업을 받은듯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낭을 벗어나자마자 잔뜩 찌푸린 하늘이 재법 굵은 눈을 뿌리기 시작했다. 거친 바람이 계곡을 타고 불어내리고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시야를 가릴 만치 거칠게 쏱아졌다. 지상에 닿은 눈조차 다시 바람을 타고 대지를 쓸고 지나가며 따갑게 얼굴을 때렸다. 눈발이 세어지는 만치 마음이 급해지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앞서간 트레커들 덕분에 다행히 길은 눈위에 드러나 있었다. 눈을 피해 고개를 수그리고 길의 흔적만 쫒아 말없는 행군이 이어졌다. 브라카에서 잠깐 티하우스를 들러 몸을 녹였다. 티하우스의 젊은 부부와 어린 아이의 차림에 가난이 묻어났지만 애틋한 삶의 온기가 사랑스러웠다. 두잔의 히말라야 커피를 주문하고, 다시 파샹이 마시는 밀크차를 두잔 더 주문해서 모두 5잔의 차를 마시고도 90루피밖에 받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몇잔의 차를 팔아 어린 자식과 더불어 겨울을 나는 그들의 가난하지만 불행하지 않은 삶이 애틋했다.
티하우스의 따뜻한 부뚜막을 떠나기가 아쉬웠지만 목적지 차메까지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서둘려야했다. 티하우스를 나와 뭉지와 홈데, 피상까지 단숨에 내달랐다. 올라올 때 묵었던 피상의 틸리초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체력을 장담할 수 없어 다른 트레커들보다 먼저 일어나 출발했다. 한시간 정도 걷다가 쉬기를 반복하다보니 늦게 출발한 한국인 학생들이 우리를 추월했다. 거침없이 내리는 눈은 배낭이며 어깨며 머리며 할 것없이 수북히 쌓였다가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목덜미에 쌓인 눈이 속을 썪였다. 배낭과 등사이에 흘러든 눈이 체온으로 녹아 옷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축축해진 등이 당장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에 열이 나도록 걷고 있을 때는 별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중간에 걸음을 멈추게 된다면 급격히 체온을 떨어트릴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눈발은 옅어졌다 다시 강해지기를 반복했지만 하루종일 멈추지 않았다. 퍄상은 틈 날때마다 확짝 웃으며 "Goog Decision! We are Lucky!"를 외쳤다. 마낭에 머물렸다간 어쩌면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한채 몇일동안 갇혀버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폭설이었다. 평생 한번도 보지 못한 거친 눈보라 속을 하루종일 걸었다. 그나마 오후부터는 마음도 조금 풀리고 자신감도 붙으면서 폭설이 내리는 안나푸르나 진풍경에 빠져들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안나푸르나의 설경을 두눈에 가득 담고 아내와 눈만 마주치면 "우와 죽인다!"를 백번도 더 외친것 같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걷는듯 신비롭고 장엄한 풍경 속에 한 생명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폭설 속에도 마낭을 향해 올라오는 트레커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두명씩 올라가는 트레커들도 서너 팀 만났지만 한번은 7~8명 되는 한팀의 한국인 트레커들과도 만났다. 올라가는 분들은 위의 상황을 물었고 우리는 그분들의 행운을 빌었다. 한번은 네팔 트레킹을 몇 번 하셨다는 비슷한 연배의 한국인 남자를 만났다. 그분은 나의 배낭이 무거워 보인다며 포터에게 왜 더 많은 짐을 지우지 않냐며 물어왔다. 그분이 보시기에 내가 너무 지쳐보이거나 약해보였는지 모르겠다. 아뭏튼 그분의 나에 대한 선의에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헤어졌다. 나는 파샹을 쳐다보고 눈웃음을 보냈고, 파샹은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고산지대에 살면서 어려서부터 무거운 짐을 져 나르던 네팔리들이 우리같은 약골에 비해 두세배의 짐을 져 나를는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파샹이 고용된 포터라기 보다는 라운드 내내 그냥 동행길의 친구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그는 충분히 좋은 그 역할 다 하고 있었다.
피상을 떠나 어떻게 걸었는지도 모르게 디카리포카리와 브라탕 탈레규를 거쳐 차메에 도착했다. 아직 어둠이 내리기 전인 5시 반에 하루의 강행군이 끝났다. 이틀 걸려 올라갔던 거리를 하루만에 내려온 것이다. 올라갈 때 묵었던 마낭주의 수도 차메의 같은 숙소인 마르상디 만다라호텔에 지을 풀었다. 벌써 도착한 트레커와 네팔리들이 다이님룸에 가득했다. 타오르는 장작난로를 둘러싸고 서너명의 호주청년들, 1명의 일본인 산악인과 너댓명의 가이드와 셀파들, 그리고 한국인 학생과 포터가 다이닝룸을 채우고 있었다.
일본인 산악인은 오늘 지나온 마을 피상을 내려다보는 해발 6090m의 피상피크를 등정하고 막 내려왔다고 했다. 그는 많이 지쳐보였고 거의 주변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은채 거친 숨을 쉬며 자신의 육체적 변화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전문산악인으로 많은 산들을 등정했고, 이번에는 혼자서 세명의 셀파와 같이 피상피크를 올랐단다. 알고보니 피상피크는 피상에 있던 한국인 위령비에 새겨진 고인들이 등정하다 사고를 당한 바로 그 산이었다. 그의 나이는 60살이라고 했다. 그 연세에 만만하지 않은 정상을 등정하고 왔으니 그의 지친 모습과 주변에 의식을 빼앗기지 않고 자신에 집중해 있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같이 했던 셀파들은 모두 큰일을 막 치룬 사람 특유의 의기양양함과 조금은 들떤 모습이었다.
7시가 넘어 사면이 어둠에 둘러쌓여 깜깜하게된 뒤에야 마낭에서 비슷하게 출발했던 3명의 독일 트레커가 도착했다. 같이 피상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우리 보다 늦게 출발한 그들이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었지만 윗마을 어딘가에 숙소를 잡아거니 생각하고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둠이 덮친 위험한 길을 마다않고 차메까지 강행군을 한 셈이었다. 눈을 뒤집어 쓰고 추위에 지친 그들을 위해 지글거리는 난로가에 모여 앉아 얼굴이 발갇게 익은 우리는 모두 일어나 환호를 질러주고 박수를 쳤다. 3000m이상의 고도에서 그것도 한치앞이 안보이는 폭설을 뚫고 하루에 800m의 고도를 줄이며 28km를 걷는 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독일인 트레커 중 형인 사람은 이번이 9번째 네팔 트레킹이라고 했다. 마지막 까지 마낭에서 쏘롱라로 올라갈 것인지 아니면 돌아 내려갈 것인지 갈등할 때 그의 판단은 나에게도 중요했다. 그는 혼자라면 쏘롱라 패스를 강행할 생각이었지만 첫 트레킹에 고산증때문에 두통에 시달리는 동생과 재수씨와 같이 강행하기에는 자신이 없어 하산을 결정한다고 했다. 우리에겐 포터 파샹의 판단이 더 중요했지만 트레킹 베테랑인 그의 판단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저녁을 먹으며 오늘 수고한 파샹을 위해 네팔 막걸리인 '창'을 시켰다. '창'은 곡물로 빗은 술인데 메뉴에는 'Local Beer'라고 나와 있었다. 맥주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막걸리와 술의 색이나 맛이 비슷했다. 아내와 나도 한잔씩 마셨는데 이날은 힘든 여정때문이기도 했지만 상행 때의 긴장감이 사라져서인지 거의 모든 트레커들이 '창'과 '락시'를 주문했다. 파샹은 전문산악인이 꿈이다보니 체력을 관리하기 위해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은 좋아하지만 딱 한잔 이상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술값 때문인지 아니면 술을 절제하기 위해선지 모르지만 파샹은 늘 그 한잔을 한모금 한모금 맛을 음미하면서 아끼며 마셨다.
다이닝룸의 온기가 아쉬워 쉬 방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한참을 파샹과 우리가 오늘 얼마나 좋은 결정을 했는지,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되뇌이며 건배를 했다. 힘든 여정을 잘 견뎌낸 아내와 자칭 'Strong Man'인 나 그리고 우리 부부의 길동무가 되어준 파샹은 서로를 치켜세우고 격려하며 또 건배를 했다. 그리고 파샹이 궁금해하는 한국에 대해, 내가 궁금해 하는 네팔에 대해 이갸기를 나누었다. 파샹은 자신은 부자를, 권력자를 혐오하는 마오주의자라고 고백했다. 나 역시 나의 정치적 입장과 한국의 정치상황, 네팔의 정치상황에 대해 짧은 언어와 식견으로 혼동스런 대화를 주고 받으며 밤이 깊어갔다.
'여신의 나라 - 안나푸르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까워져 비현실이 된 마차푸차레 - 간드룩에서 촘롱까지(12.01.14) (2) | 2012.03.21 |
---|---|
안나푸르나 품속으로 가는 길 - 나야풀지나 간드룩까지(12.01.13) (0) | 2012.03.19 |
휴식과 도전의 설레임이 교차하는 안나푸르나의 도시 - 포카라(12.01.12) (0) | 2012.03.17 |
산보다 도시가 좋은 파샹과 걷는 길 - 참체지나 베시사하르까지(12.01.11) (0) | 2012.03.16 |
붉은 깃발과 맛있는 김치가 있는 마을 - 카르테 지나 딸까지(12.01.10) (4) | 2012.03.13 |
다 하지 못한 길 - 아름다운 강마을 강사르(12.01.08) (2) | 2012.03.08 |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여정 - 피상에서 마낭까지 (12.01.07) (5) | 2012.03.05 |
걷는 멋보다 쉬는 맛이 알찬 여정 - 차메에서 피상까지(12.01.06) (0) | 2012.03.02 |
산중에서 만난 마을 자치의 꿈 -티망에서 차메까지(12.01.05) (2) | 2012.02.20 |
산보다 삶이 더 아름다운 길-딸에서 티망까지(12.01.04) (0) | 2012.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