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2 봉화군농민회 농민의날 토론 / 농민농업과 농민운동의 변화 /춘양주민문화복지센타
송성일(농어업정책포럼 직불금분과위원장)
1. ‘농민농업’을 만나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농민’의 삶을 계속 살아낼 수 있을까 회의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선택한 농민의 삶이지만 자긍심은 바닥났고, 장래는 더 암담해졌다. 한자리에 둘러앉기라도 하면 우리는 이미 갈 데도 없고 이렇게 살다 죽으면 그뿐이지만 어쩌면 우리가 한국의 마지막 농민이 되지 않을까 자조를 나눈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네덜란드의 학자인 ‘얀 다우 판 더르 플루흐’를 알게 되고 그가 제시하는 “농민농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농민농업”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농업을 하면 농민이고 농민이면 농업을 하는 게 당연한 것을 웬 “농민농업”이라니? 하고 반문했고 ‘전문용어’ 만들기 좋아하는 학자가 또 쓸데없는 짓을 했나는 의구심을 가졌다.
픞루흐는 농민농업을 자본주의의 전일적 지배 속에서도 지속 가능한 대안적 영농양식으로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이미 세계는 ‘농민다움’을 회복한 새로운 농민이 주도하는 ‘농민농업’이 확대되는 “재농민화” 추세로 역전되었다고 한다. 그가 주장하는 바가 진실이라면 우리가 느끼는 위기는 가짜이거나, 우리의 영농양식이 더욱 ‘농민다워짐’으로써 해소 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2. 신자유주의 시대에 농민으로 살아남기
우리가 농민의 삶이 지속 가능한 조건을 모색할 때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접근한다. 하나는 시장경쟁력을 가지는 ‘선진농업’을 이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탈 시장 농업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선진농업’은 자본 없는 우리에겐 너무나 멀리 있고, 탈 시장의 길은 고달프고 또 현실적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다. 결국,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플루흐는 ‘농민농업’에 주목한다.
‘농민농업’은 ‘경영자 농업’과 대비되는 ‘새로운 농민’의 농업이다. 그런 면에서 농민농업은 경쟁력 있는 선진농업은 분명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히 탈 시장을 목표로 한 새로운 농업 양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농민농업은 농업의 내재적 특수성에서 그 가능성을 찾는다. 플루흐는 “자본주의적 맥락이 농민 생산 단위의 활동에 조건을 부여하고 영향을 주더라도 농민 생산 단위를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차야노프의 인식에서 입론을 시작한다. 농민은 시장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조차 비시장적 속성을 유지한다. 전통적인 ‘가족 소농’은 공황이 와도, 외환위기가 와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위기를 이겨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농민농업은 자본주의적 농장이 생산을 멈춘 곳에서도 계속 생산한다.” 가족소농은 외부적 충격에 대응하며 나름의 균형을 찾아 헤쳐나간다.
농민농업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하는 영농활동이다. 농민은 삶을 지속하기 위해 열악한 외적 조건에서도 자본의 동원을 최소화하는 등 외부자원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내부자원을 최적화한다. 또한, 내외부 자원의 균형을 이루면서 생태 경관을 돌보고, 자연의 생물 다양성을 영농실천안으로 통합하고, 농가와 이웃 사이의 균형을 증진한다. 기본적으로 공동체적 영농을 지향한다. 그러다 보니 농민농업의 ‘이윤’을 목포로 하는 자본주의적 영농, 경영자형 영농과는 대척점에 서게 된다. 물론 농민농업은 자본주의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동시에 농민농업은 ‘농민들의 영농 실천 그 자체가 자본주의적 체제와 불화하는 투쟁’이게 한다. 플루흐가 말하는 농민은 ’자율성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고 투쟁하는 농업 실천의 주체‘이다. 따라서 ’농민‘자체는 자본주의 체제가 빗어내는 온갖 비극과 부조리에 저항한다.
전일적인 시장 지배 사회에서 농사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시장과의 관계를 소화하면서 동시에 시장을 극복하는 과정이 병행될 수밖에 없다. 대다수 생태환경 농업을 하는 농민이나 가족 소농의 삶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름대로 시대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저항한다. 독자적인 영농기반을 구축하면서 동시에 공동체 협업농업을 지향하고, 최적화된 영농기술을 실험하고 도입하는 데 적극적이면서 동시에 생태환경과 조화로운 영농방식을 찾고, 시장과 교섭하면서 동시에 시장 밖 유통의 길을 모색한다. 오직 농민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농민농업을 영위하고 있는 ’새로운 농민‘이 아닌가? 하지만 몇 가지 의문이 있다.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재농민화‘의 근거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전 세계 먹거리의 70%를 ’농민농업‘이 담당하고 있다고 하는데 농민농업이 확대되는 추세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침식당하는 추세인지는 알 수가 없다. 특히 한국의 상황만 볼 때 ’재농민화’ 추세가 확인될 수 있는지, 여전한 농민층분해가 가속되고 있는 상황이 아닌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3. 농민농업이 가능한 사회적 조건
무엇보다 큰 의문은 ‘농민농업’이 농업이 가진 내재적 특수성에 기인하지만 이를 발현케 하는 것은 결국 농민 개인의 도덕적 혹은 실존적 결단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농민농업이냐 경영자형 농업이냐의 선택을 농민 개인이 친환경 농사를 지을 것인지 관행농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과 같은 메커니즘에 맡겨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이와 같은 자명한 사실에 충실하다면 ‘농민농업’이 가능한 사회적 정책적 기반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농민농업’이 외부자원의 투입을 최소화하면서 자가노동 중심의 영농양식을 고수할 때 이미 비대해진 개인의 소비요구를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한 소출이 가능한가는 문제도 남는다. 가구당 2대 이상의 차량, 핸드폰, 통신비, 여행, 교육 등등 농민 역시 시대의 자식인 만큼 도시민과 다르지 않은 욕망의 결정체다. 하지만 ‘가족 소농에 기반을 둔 생태적 영농행위’가 이들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없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명백하다. 농민에게 ‘자본주의적 욕망’을 거부하고 ‘자발적 가난’을 넘어 거의 수도사적 금욕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착취농업을 통해 아등바등 소비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을 거부하고 ‘농민농업’을 영위할 것을 권유할 수조차 없다. 따라서 ‘농민농업’을 영위하고도 기본적인 삶의 요구가 충족되는 사회적 보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사회적 합의가 먼저 필요하다.
현 정부는 농정대개혁을 예고하며 출범했다. 그 핵심은 ‘공익형 직불제’ 중심으로의 농정 개혁이다. 어떻게, 어떤 규모로 설계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기본적으로 ‘공익형 직불제’가 ‘농민농업’이 가능한 사회적 기초를 닦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본다.
4. 공익형 직불제란 무엇인가?
문재인 정부의 핵심적 농업 공약인 ‘공익형 직불제’는 경쟁력 중심의 생산주의 농정을 탈피하고 농민의 삶 중심의 농정으로 전환하기 위해 기존까지의 사업 보조금 중심 정책을 직접지불 정책으로 전환하는 제도다. 다시 말해 공익형 직불제는 농업활동이 식품안정, 환경보전, 농촌 유지 등 공익을 창출토록 농민에게 직접 지불하는 정책이다.
정책 도입 목적으로는 첫째, 쌀 중심 농정 패러다임을 전환하여 작물 간 형평성을 확보하는 데 있다. 기존의 직불금은 쌀 단일 작물에 직불 예산의 약 80% 이상이 지불되어 상대적으로 쌀의 과잉생산을 초래하고 수급불균혛을 심화시틴다는 인식에서 모든 작물을 대상으로 동일 금액을 지금하여 논밭간의 형평성을 제고하고, 콩이나 사료 작물 등의 재배면적을 확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두 번째, 공익형 직불제는 농업의 공익성을 증진하기 위해 생태-환경 보호 의무와 식품안전, 공동체 유지 활동을 강화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나라 농업은 단위면적당 화학비료 사용량이나 농약사용량이 2배에서 10배까지 초과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생태환경 보호는 공익형 직불제 지급 조건이면서 동시에 소득 최소선이 보장됨으로써 착취농업의 압박에서 벗어나 가치 있는 영농활동을 가능케 하는 공익형 직불제가 가져올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셋째, 중소농가에 대한 소득안정기능을 강화하여 농가 간 소득불균형을 축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행 직불제 아래에서 면적 기준 상위 7% 농가가 직불금의 38.4%를 하위 72%의 농가가 직불금의 29%를 받고 있다. 대농편중 현상이 심각한 지경이다. 공익형 직불제는 ‘하후상박’의 지급원칙에 따라 농가 소득 불균형을 축소하는데 이바지할 것이다.
이들 목적을 위해 공익형 직불제는 재배작물과 무관하게 같은 금액을 지급하고, 소규모 농가에는 경작면적과 무관하게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소농직불을 도입하고, 그리고 농업의 공익적 기능을 증진하기 위한 생태환경 관련 준수의무 사항이 부과되는 형태로 설계되고 있다.
정부가 준비 중인 공익형 직불금(농업농촌 공익증진직불제)의 기본구조는 먼저 현행 9개 직불제 중 쌀 직불금, 밭 고정직불금, 조건 불리 직불을 통합한 ‘기본형 공익직불’과 친환경 직불, 경관보전 직불을 ‘선택형 공익직불’로 구성된다. ‘기본형 공익직불’은 0.5헥타 미만 경작 농가에 대해서는 연 백만원 전후의 정액을 지급하는 소농직불금과, 그 토대 위에 영농규모에 따른 면적직불금으로 구성된다.
5. ‘공익형 직불제’ 에 얽힌 몇 가지 난제들
경쟁력 중심의 생산주의 농정을 탈피하고 농민의 삶 중심의 농정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 ‘공익형 직불제’의 도입은 핵심과제이다. 생산주의 농정은 보조금 중심 정책으로 그 폐해와 한계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를 도입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몇 가지 선결과제들이 있다.
먼저 예산확보 문제가 있다. 이는 넓게는 국민적 공감대, 좁게는 정치권과 기재부를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아가 우리 사회가 농업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는사회적 합의를 이 끓여내야 하는 장기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우선 2020년 직불금 예산을 정부안 2조 2천억 원을 받아 농해수위가 3조로 확대해 의결했다. 다음은 기재부와 국회 본회의를 남기고 있지만 3조에 가까운 예산이 확보될 것으로 본다. 올해 직불금 예산이 1조4천억 정도인 것에 비하면 충분하지는 않지만 공익형 직불제 도입을 위한 초동 예산으로는 의미 있는 진전이다.
두 번째, 직불제 단일화 문제의 핵심은 쌀 변동직불금 폐지인데, 이에 대한 쌀 농가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하다. 쌀에 편중된 직불금이 상대적으로 쌀의 과잉생산을 가져오고, 과잉생산은 쌀값 폭락을 초래해 변동직불금이 집행되는 악순환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 정부 생각이고, 대농 중심의 벼농사 농민은 쌀의 민족적 특수성, 밭작물로의 전환을 막는 측면, 그런데도 여전히 논이 줄고 있다는 지표를 제시하며 쌀 변동직불금의 폐지를 전제한 공익형 직불제를 반대하고 있다. 일단 정부가 쌀값 지지를 위해 제시하는 ‘사전자동시장 격리제’와 ‘소득보장보험’의 실효성을 세밀하게 살펴 쌀 변동직불금 폐지가 벼농사 대농에게 어느 정도의 손실을 주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어느 수준이 되어야 농민이 기대하는 쌀값이 보장될 수 있을지 검토하고 그 이전에 적정한 쌀 생산량에 대한 사회적 합의 등을 통해 해결해 나간다면 쌀생산 농가의 동의를 끌어내기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지방자치단체 중심으로 도입되고 있는 ‘농민수당제’를 중앙정부의 ‘공익형 직불제’와 어떻게 배치/통합할 것인가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일부는 ‘농민수당제’를 건드리지 말고 그 자체의 발전 방향을 찾아 나가게 두고 보자는 입장도 있지만 일단 재원의 부족, 발전전망의 불투명성은 걸림돌이다.
농민수당제는 1) 농민주도로 도입된 제도로 농민이 농정의 주체로 자리매김한 정책으로 2) 지방정부 중심으로 도입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지방농정의 주도성을 구현한 정책의 의미가 있으며 3)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직접 지불적 의미는 생산주의 농정에서 농민의 삶 중심의 농정의 핵심인 공익형직불제를 도입을 앞당기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고 본다.
하지만 농민수당제는 1) 중앙정부 주도의 "공익형 직불제"와 중첩되지 않게 정리가 필요하고 2) 농업의 공익성에 대한 보상이냐 농민복지정책이냐는 문제(농업예산이냐 복지 예산이냐)가 남아 있고 3) "농민수당"은 직불제의 하위개념이 아니며 직불제는 생산을 보전하는 측면이며 "농민수당"은 농업의 공익적 가치, 다원적 기능에 대한 보상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농민수당”의 발전 방향은 “농민 기본소득”으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6. ‘농민농업’의 사회적 조건 [농민 기본소득제]
농민수당과 ‘공익형 직불제’의 통합적 발전 방향은 농민 기본소득제다. 물론 농민 기본소득제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국민 기본소득제로 나아가는 사회적 변화의 방향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공익형 직불제를 구성하는 ‘기초직불금(소농직불금)’과 지방정부 중심의 ‘농민수당제’를 “농민 기본소득제‘로 통합 정립한다면 지금 단계에서도 가능한 방안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농민농업‘은 시장 만능의 시대에 농민의 자긍심을 지키면서 농업을 지키는 새로운 영동 양식이라는 데 동의한다. 이를 사회적으로 확산하기 위한 조건으로 농민의 기본적인 삶을 사회적으로 보장하는 ’공익형 직불제‘ 나아가 ’농민 기본소득제’를 도입해야 한다. 이를 통해 농업이 아름다울 수 있고, 농민이 행복해질 수 있고,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 지금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농업정책은 공익형 직불제고, 이는 농민 기본소득제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토론문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