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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2일

아침 8시 백사장항과 드르니 항을 이어주는 조망다리를 건너 청포대, 달산포, 몽산포를 그쳐 해안사구에 형성된 솔숲길을 걷고 해안으롭 멋어나 남면에서 버스를 타고 태안읍을나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학암포까지 이동하고 학암포에서 걸어 구례포에 도착 하루 여정을 마무리 했다. 

어제는 노을없는 5코스 노을길을 완주하고, 집나온 지 처음으로 실망스런 저녁을 먹고, 여정의 끝에 김기덕 감독의 사망 소식마저 들었다. 나에겐 아무 일도 없었던 평화로운 하루였지만 영화감독 김기덕은 낯설은 이국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일면식도 없고,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단지 그의 고향이 봉화라는 이유로 딱 한번 생가터를 찾아 이웃의 입을 통해 그에 대해 들었던 것이 전부였지만 그의 죽음은 계속 나의 뇌리를 맴돌았다. 천제적인 영화감독으로 살다, 성추문으로 상처받고 이국땅에서 쓸쓸히 죽어가야 했던 그의 운명이 애닯았다. 하지만 한 인간이 가진 어리석음과 잘못의 댓가는 또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기에 그의 영광과 치욕이 함께 그의 죽음을 통해 무로 돌아가길 빌었다. 죽음 뒤에 따르는 비난도 생전의 예술적 성과에 대한 칭송도 이제 산자의 몫이지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은 드르니항에서 태안 8경의 하나인 몽산포로 이어지는 4코스 솔모랫길을 완주하기 위해 조금 일찍 숙소를 나섰다. 백사장항에서 드르니항으로 넘어가는 인도교는 엄청난 높이에 큰 규모로 지어져 다리를 건너는 내내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생활도로도 아니고 물론 차도 다닐 수 없고 오직 트레커나 관광객을 위한 다리치고는 너무나 거창했다. 그래도 막상 다리위에서 바라다 보는 서해의 풍경은 장엄했다. 다리를 건너자 아침 해가 동쪽하늘로부터 비추기 시작했다. 석양대신 여명을 사진에 담고 드르니를 벗어나 갯벌과 양어장 사이의 둑방길을 따라 길을 이어나가자 바다풍경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신온리라는 지명의 염전이 펼쳐졌다. 염전을 따라 걷다보니 길은 다시 솔숲으로 접어들었고 우리는 고운 모래밭에 형성된 솔숲 사이를 쉼 없이 걸어 나갔다. 2시간을 걸려 6키로쯤 솔숲을 걸은 끝에 청포대에 이르렀고, 길은 다시 해변을 따라 달산포까지 이어졌다. 해수욕장은 청포대, 달산포, 몽산포로 나뉘어져 이름을 얻고 있었지만 뚜렷한 경계도, 이름을 나눈 특별한 이유도 없었고 그냥 하나의 해변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간혹 바닷새 무리를 만나 걸음을 멈추기도 했고, 그래도 주말이라고 해변에서, 솔숲길에서 사람들을 마주치기도 했지만 마음의 평화를 깰 정도는 되지 못했고, 그냥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고 햇살을 빨아들이며 아무런 동요도 없는 적멸의 영역에 들어선 듯 가볍고 평화로운 걸음을 이어가니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길이 줄어 몽산포의 헤수욕장의 남쪽 끝단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몽산포로 접어들 무렵 시간은 정오를 넘어서고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해변을 다라 가서는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판단에 길을 육지 쪽으로 틀어 남면 면소재지로 기수를 돌렸다. 금방 나올 것 같던 시가지는 쉬 나오지 않았고, 배고픔에 거의 지쳐갈 즈음 남면 면사무소에 도착했다. 면사무소 건너길 모서리에 자리한 후줄구레한 식당은 한눈에 썩 끌리지는 않았지만 배는 고프고 다른 대안을 찾기도 귀찮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신성식당이라는 이름의 동네 식당에는 이미 피크를 넘긴 점심시간이기도 해선지 조용했다. 공사장 인부차림의 손님이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드시고 계셨지만 이내 식당에는 우리만 손님으로 남게 되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추천하는데로 평소에 먹고 싶던 물곰탕을 시켰다. 이내 상이 차려지고 물곰탕이 나왔다. 그런데 웬걸,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너무나 푸짐하고 시원하고 맛있는 식사를 만났다. 아침도 먹지않고 오전에 15키로를 쉬지 않고 걷고 나서 만난 물곰탕은 허기와 피로를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남면에서 오전 걷기를 멈추고 버스를 타고 태안읍으로 이동했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태안의 북단이자, 해변길 1코스의 시작점인 학암포롤 향했다. 남면에서 태안읍을 거쳐 다시 남폭운전하던 버스를 갈아타고 학암포까지 도착하는데는 한시간을 조금 넘는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학암포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숙소를 얻을 계획이었지만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하다보니 걸음을 조금 더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학암포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풍경이 아름다운 만치 그만치 사람의 발길이 잣고 상업화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애써 눈을 바다로 돌려 섬과 해안이 조화로운 풍경만을 담았다. 해안까지 바짝 붙어 형성된 사설 텐트촌과 방갈로, 그리고 상업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는 상가들을 피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어나갔다4키로 정도를 한시간 동안 걸으니 구례포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구례포 역시 해안쪽 모레사구에는 텐트촌들이 형성되어 있었고 예상외로 텐트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아이들이 텐트사이를 뛰어다니고 여기 저기 고기곱는 연기조차 피어오르고 있었다. 막 텐트장을 들어서는 차들도 적지 않았다.

해안을 벗어나 634번 지방도를 따라 드문드문 자리한 민박과 펜션을 찾아 나섰지만 쉬 숙박지를 정할 수가 없었다. 어떤 집은 영업을 접었는지 문이 잠겨있었고, 어떤 집은 아예 코로나 때문에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문적박대를 했다. 다행히 길가의 펜션 안내판을 보고 전화를 돌린 끝에 파스텔팬션에 여정을 풀 수 있었다. 코로나가 휴가 풍경도 바꿔놓았는지 텐트촌은 사람들이 붐볐지만 막상 펜션에는 손님이 들지 않았다. 우리가 묵은 팬션 역시 우리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주인의 소개로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의 식당을 소개 받았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식당은 영업중이었고, 막 도착한 경찰관들이 식사를 위해 식당을 들어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뒤이어 우리가 식당을 들어가려고 하니 주인이 질색을 하면 우리를 외면했다. 코로나 때문에 단골 손님외의 여행객들은 손님으로 받을 수 없다며 매몰차게 우리를 문적박대 했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민 것은 사실이었지만 뭐 코로나 공포가 그런 대응을 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숙소로 돌아와 주인아주머니를 찾아 라면이라도 빌려줄 것을 부탁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슈퍼마켓이 있고 차로 우리를 데려다 주셨고 라면과 도시락 등 간단한 식재료를 구입해 숙소롤 돌아올 수 있었고, 주인아주머니께서 맛있는 김치까지 한포기 내어주시는 바람에 그나마 저녁을 성찬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집 나온지 4일동안 옷점에서 만나 신세를 졌던 최씨 할머니, 장곡에서 차를 태워졌던 주민분에 이어 오늘 예정에 없던 차를 태워주고 김치를 내어준 파스텔 팬션을 이번 여정의 3번째 은인으로 기억에 남겼다.

저녁을 먹으며 켠 TV는 코로나가 다시 대유행기로 접어들었다는 뉴스로 도배를 했다. 숙박시설이 비고 손님을 거부하던 팬션과 식당도 경험하고 나니 우리도 남은 일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일정을 줄일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한 이틀 정도 일정을 늘일까했던 나의 생각은 일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제는 초소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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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아침 9시경 한옥마을에서 택시로 전주고속터미날 도착, 대전행 버스를 타고 11시경 대전터미날에 도착, 태안행 버스를 기다리며 점심을 먹고 쇼핑을 즐기다가 12시반경 태안으로 출발했다. 태안에서 안면행 버스를 갈아타고 15시경 안면에 도착, 15 20분 영목행 533번버스를 타고 16시경 이번 트레킹의 출발점인 영목항에 도착했다.

 

 

조용하고 소박한 한옥민박집에서 편안한 잠을 잤다. 제공하는 조식을 사양하고 전날 들고 다니던 간식으로 아침을 떼우고 거리로 나섰다. 우리의 목적지 태안을 향해 간다는 설레임이 앞섰지만 그렇게 바쁠 것도 없는 하루를 일찍 시작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전주 터미널에서 쉽게 대전행 버스를 잡았다. 버스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몰두 하다보니 이내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 터미널에 도착하고 보니 전날 묵었던 전주와 대비되어 촌에서 다시 도시로 나온 듯 휘황찬란했다. 붐비는 대합실과 다양한 가게들이 성업중이다보니 사람들이 마스크만 쓰지 않았다면 코로나가 오기 전 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내는 트레킹에 맞는 바지를 사고, 나는 대합실을 서성이며 다음 버스로 이어지는 여백을 만끽하며 기억창고를 살찌웠다.

 

 

대중교통으로 이어지는 하루일정이 영목항에서 끝나기까지 한번의 택시와 4번의 버스를 타야했다. 전주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태안으로, 태안에서 안면으로, 다시 안면에서 영목으로 이어지는 버스 여행은 착착 맞아떨어지는 연결 버스 덕분에 기대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루종일 차를 타는 지겨운 하루 일정중에도 대전이라는 대도시 대합실의 번화함도 즐기고, 태안의 정감넘치는 소박한 터미널의 정취도 즐기고, 안면읍의 장터에서 버스를 내려 영목으로 이어지는 버스를 기다리며 느꼈던 시골 장터의 가난하지만 따뜻한 서정조차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배낭을 메고 여행중이어서일 것이다. 마지막 늦은 오후 사람의 발길이 끊기고 무겁게 내려앉은 흐린 하늘아래 찬바람만 가득한 영목항 종점에 발을 내디딜 때 왠지 모르게 울컷 솟아나던 서글픔이 있었다. 지나간 모든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이제는 다시 못볼 인연들에 대한 애도의 정감인지, 아니면 바닷바람이 상기시킨 고향진해와 그 바닷가에서 놀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어린시절의 추억 때문인지도 몰랐다.

 

 

예정된 라디오 인터뷰가 있어 미리 ‘영목항회관’에 방을 잡고 아내는 바닷가 스케치를 나갔다. 난생처음 여행지에서 준비가 덜된 라디오 인터뷰를 어설프게 마치고 막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영목항으로 나섰다. 가설다리로 연결된 바지선을 따라 작은 고깃배들이 수십척 정박해 있는 저녁바닷가는 평화로웠다. 바람이 잦아든 해안에는 찬 공기가 내리누르고 인기척 없는 선착장엔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짧은 산책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와 ‘회덮밥’으로 긴 이동이 이루어진 하루의 노고를 치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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