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딸애의 합류와 이런저런 다른 사정까지 겹쳐 일정은 12월로 연기되고, '대기'상태의 배편을 구한 상태에서 숙소를 예약한뒤, 배편이 틀어지면서 예약된 숙소의 일정을 바꾸기도 하는 우여곡절끝에 해를 넘기고 지난 1월 22일 드디어 배낭을 매고 집을 나섰다. 일주일동안 집을 지켜야되는, 자기가 사람인줄 착각하고 사는 우리집 똥강아지 초롱이가 서운한 눈빛으로 우릴 배웅했지만 개무시하고 악세레다를 밟았다.
세식구가 함께 챙겨야될 가방의 수를 확인하고 각자가 책임져야할 몫을 나누다보니 금방 기차가 도착했다. 12시 12분 안동발, 16시 27분 부산 부전역도착예정인 무궁화호는 넉넉하게 좌석이 비어 있었다. 그래도 좌석번호를 찾아 선반에 짐들을 올려놓고 차창밖으로 사라져가는 안동의 익숙한 풍경들을 두 눈에 담았다. 낯선 풍경들이 차장을 스치기 시작할 즈음 카페열차칸을 운영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카페열차칸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의 낭만을 찾아 들어선 카페열차는 텅텅 비어있었고, 매장은 빈약했지만 그래도 창을 스치는 겨울 산하의 풍경을 바라보며 따끈한 원두 커피 한잔의 향기에 취했다. 카페칸 차창을 스치는 풍경은 객실 차창을 스치던 바로 그 풍경이 아니었다. 커피향 가득한 까페열차칸에서 바라다보는 차창밖 풍경은 지난 추억을 고스란히 환기시켰다. 어린시절 무서운 꿈을 꾸다 잠은 깬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식구들 사이에서 혼자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든 새벽, 소년의 귀에 울려오던 새벽기차소리는 두려웠던 밤이 다 가고 새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구원의 소리에 다름아니었다. 중학교3학년 시절 갑자기 공부에 신명이 붙어 책보다 더 많은 도시락을 담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새벽 기차를 타고 전교 1등으로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시발역인 진해역에서 경화역까지 짦은 시간동안 새벽기운이 걷혀가는 세상을 차창밖으로 바라다보던 소년의 가슴은 온갖 굴레에 묶인 지금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능할 미래에 대한 꿈들로 벅차올랐다.
안동을 벗어난 기차는 간혹 낙동강을 나란히 달리다가 낙동강의 지류들을 건너기도 하고, 의성과 군위를 지나면서는 낙동가의 본류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 편히 아름다운 겨울강을 바라다불 수만은 없었다. 한달쯤 전 구미에 일이 있어 갔다가 4대강사업으로 구미보를 설치하는 공사장 주변을 지나칠 일이 있었다. 그때 말로만 듣던 4대강사업 현장을 직접 두눈으로 보면서 강변 농토에 끝없이 쌓여있는 준설토 무더기와 거대한 보기둥을 보면서 경악했다. 한 인간의 야욕이 무참히 뭉개버린 자연을 바라다보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야만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절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발권을 하고 한참을 서성거린뒤에 먼저 출항할 시모노세끼행 성희호 승객들이 승선을 하는 과정을 구경을 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가 타고갈 하카다행 뉴카멜리아호 승객들의 승선이 시작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침에 집을 나와 이제사 후쿠오카행 배를 타게되는구나 하는 안도감과 설레임을 안고 들어선 승선장에는 면세점이 있었지만 잠깐 구경만하고는 곧장 배에 첫발을 디뎠다. 뉴카멜리아호 갑판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렇게 큰 배였지만 생각지도 않은 울릉거림이 전해져 왔다. 그 울릉거림이 파도때문인지 설레임때문인지는 알수 없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갖는 여행의 꿈은, 막상 길 떠나게 되면서 막닥뜨리는 구질구질한 현실과 의외의 변수들에 의해 뭉개져 버리지만 그래도 현실은 그 꿈보다 훨씬 풍부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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