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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한 죽음의 고유성을 회복함으로써 현대적 삶이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다.
 

[애도하는 사람]은 삶 속에서 분리된채 가려진 죽음의 현재성을 되살리는 작품이다. 현대인은 위대한 과학의 성과를 토대로 신에 의한 천지창조에 버금가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에 성공했고, 그렇게 창조된 세계 안에서 인간의 위상을 재정립했다. 과학은 인간을 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고, 인간의 삶은 그 자연적 한계를 모두 극복한듯 보였다. 자연은 인간의 이성아래 재정립되고, 인간의 삶에서 모든 자연적-비합리적 요소를 배재할 듯 보였다. 하지만 현대과학을 통해 극복한 삶은 그 극대화된 합리성과, 위대한 과학의 은총아래서도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장벽에 봉착한다. 그것은 산업화된 현대사회에서 그 의미를 달리했지만 죽음은 생명탄생과 짝을 같이해 인간의 삶에서 비과학적인 영역, 이성적 빛이 비춰질 수 없는 영역으로 끝내 남게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에 굴복하며 신의 문턱에서 좌절했지만 오만해진 인간은 그 증표인 죽음의 처리에 골몰한다.  


여기서 절대화된 과학, 산업화된 자연,, 절대화된 이성의 빛아래 '죽음'은 필연의 영역에서 잘못 끼어든 실수거나, 제거되어야할 우연적인 오류로 처리된다. 그래서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격리되고, 가려지고, 잊혀지고 만다. 죽음은 삶에 우연적으로 잘못 끼어든 잡티나 불순물일뿐 우연적인 발생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청소하듯 흔적조차 지워버려야할 것으로 격하된다.


[애도하는 사람]은 이렇게 현대사회에서 죽음과 삶의 잘못된 분리를 고발한다. 삶은 죽음의 이면일뿐 독립되거나 분리될 수 없는 인간존재의 근원적 본질임을 폭로한다. <애도하는사람>은 죽음으로 가득하다. 지천이 죽음이고 그 죽음의 사이사이에 삶이 기생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일본 도시의 풍경이 <애도하는 사람>이 펼쳐지는 구체적 현실이다. 일본 고유의 죽음의 미학에 기반한 작가는 죽음으로 곽찬 도시를 통해 충만한 삶의 의미를 되살린다. 이 삶과 죽음의 역설이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에서 극복된다. 그 극복의 과정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삶의 존재 이유를 찾는 시즈토의 순례길과 나란히 이어진다.


시즈토의 애도여행은 스스로 직면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그는 타인의 죽음의 무가치성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아무도 주목하거나  안타까와하지 않는 죽음은 세상과 격리된채 철저히 삶과 세상과 격리된채 어느날 갑자기 절대적 무로 인간을 덮쳐온다. 인간은 현재의 삶을 누리며 미래의 삶을 준비하지만,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죽음은 비현실이기 때문이다. 시즈토의 애도여행은 죽음의 현재성을 회복하는 순례의 여정이다. 시즈토에게 죽음의 현재성을 극복하는 의식은 잊혀진 죽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을 기억하고 기록하며 그 삶과 죽음을 하나로 애도하는 의식이다. 불타가 죽음의 허망함에 직면하고, 삶의 공허함에 절망한채 성을 나가 구도의 길을 떠나듯 그렇게 시즈토는 집을 나섰지만 그가 걸은 구도의 길은 우주의 원리나 존재의 근원을 꿰뚫는 위대한 깨달음의 길은 아니다. 소박한 개개인의 죽음 하나하나에 '그는 누구에게 사랑받고, 누구를 사랑했으며, 누구에게 감사를 받은적이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차가운 죽음에 삶의 온기를 불어넣고, 그 삶의 허망함에 죽음의 숭고함을 부가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무의미성을 극복한다.
그의 깨달음은 단순하다.
"누군가의 죽음이 잊혀지면 나중에는 모든 사람의 죽음이 잊혀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잊혀진 모든 사람의 죽음속에 나의 죽음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고 애도한다면, 나중에는 모든 사람의 죽음이 기억될 수 있고,그 기억된 모든 사람의 죽음 속에 나의 죽음이 있게 된다. 기억된 죽음은 허무하지 않고, 허무하지 않은 죽음은 허망하지 않은 삶을 가능케 한다.

더불어 시즈토의 어머니 준코의 발병과 죽음의 과정은 철저한 죽음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녀는 죽음을 찬미하고, 탐미한다. 공포가 제거된 죽음, 자연스런 삶의 한 과정으로서의 죽음은 아들 시즈토의 죽음의 순례길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삶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삶의 무게를 내려 놓음으로써 죽음의 무게를 동시에 줄여나가는 작업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고양하는 과정을 통해 역으로 그 삶의 연장으로서의 죽음의 자연스러움을 깨우쳐가는 죽음의 여정은 철저히 아들 시즈토의 순례길과 겹쳐지면 또 다른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일상, 죽음에 직면한 한 개인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보여준다.

[애도하는 사람]시즈토와 더불어 애도여행을 동반하는 도반은 또 있다. '에그노'라 불리며 삶의 지고지순한 신비와 가치를 잃어버린 마키노 고타로는 시즈코의 애도 여행을 추적하는과정에서 숭고한 죽음의 가능성을 깨닫고 다시 삶의 신비와 가치를 회복한다. 사쿠야와 유기요 역시 시즈코의 애도여행을 동반하면서 죽음에 대한 욕망, 삶과 분리된, 절망적인 삶으로부터 탈주한 죽음의 탐미를 포기한다.

[애도화는 사람]은 해피엔딩이다. 어머니 준코의 죽음은 여동생 미시오의 출산과 겹치며 삶과 죽음의 통일을 완성한다. 애도하는 사람 시즈코의 구도의 길은 마키노 고타로와 유기요가 뒤따른다. 

[애도하는 사람]은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한다. 작가 텐도 아라타는 이 지점에서 위대한 세계구원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죽음의 개별성을 회복하라. 그를 통해 개별적 삶의 허무가 극복되고, 바로 내 삶의 고유성, 내 삶의 존재이유와 의미가 창조되나니!!

"죽은 자들은 자신을 애도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애도하는 사람]이 무의미한 죽음, 따라서 허망한 삶에 직면한 현대인에게 던지는 유일한 구원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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