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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초에 감자밭에서 풀을 메다가 전화를 받았다. BY2C(봉화, 영양, 영양, 영월, 청송)의 지자체간 협력사업으로 추진중인 '외씨버선길' 추진 사업단에서 지난 봄 제주 올레길에 이어 지리산 둘레길 벤치마킹을 떠난단다. 처진 밭일을 어떻게든 마무리해야한다는 당위와 '지리산'이 발하는 강력한 유혹사이에서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나의 자제력은 오래가지 않았고 동행을 약속하고 배낭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사업단의 일원이 아니라 봉화군의 주민으로서 봉화군청 공무원4명과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간 '외씨버선길'사업의 추진 과정을 간접적으로 넘겨다 보면서 여러가지 측면에서 부정적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지리산'을  공짜(!)로 갈 수 있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동행의 이유가 충분했다.


7월 15일 오전 9시 30분 안동 상공회의소 마당에 스무명 남짓의 일행이 모였다. 이내 버스는 달리기 시작했고 3시간만인 오후 1시경 88고속도로 지리산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지리산 자락이 지나가는  남원시 인월면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해 있던  '외씨버선길' 사업을 주관하는 경북북부연구원관계자와 이번 연수를 주관하는 한국생산성본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남원의 특산물인 붕어를 주재료로 만들 '어탕'으로 거뜬한 점심을 들고 식당에서 멀지 않은 '지리산길 안내센타'를 들러 이번 연수의 첫프로그램인 사단법인 숲길의 이상윤 상임이사의 특강을 들었다.  


안내센타는 아직 충분한 안내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아 보였고, 안내 책자나 여타 지리산길 안내 건텐츠가 구비되어 있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운치를 가진 공간이었다. 산림청의 국유림관리사무소로 사용되던 공간을 사단법인 숲길에서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늘 붐비는데 비해 근무직원도 적고 편의 시설도 부족했다. 하지만 걷는 길을 찾아 오신 분들은 이미 불편함을 감수할 심리적 준비가 되어있는 분들이라고 본다면  시설의 부족은 별반 문제될것이 없고 단지 안내 시스템의 개선이나 컨텐츠의 확보는 필요해 보였다.


숲질 이상윤 이사의 특강은 인상적이었다. 강사의 외모가 주는 인상부터  '지리산길'이 담고 있는 가치를 체현하고 있는듯, 소박하고 관행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차림의 강사는 강의 스타일 역시 범상하지 않았다. 5분강의 후 질문과 답변으로 채우기로 했던 특강은 강사의 강의가 표명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지면서 충분한 질의 응답시간을 가지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지리산둘레길'의 가치가 어떻게 사업과정에서 구체화되고, 현실화되었는지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지향하는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구현하고자하는 사람이 있은 연후에 물리적 공간에서 지리산길이 태어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실제 외씨버선길 사업을 추진할 주체에게 들려주는 것 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강연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인월안내센타를 나선 일행은 다리를 건너 안내센타앞 하천을 따라 (사)숲길에서 나오신 두분의 '길동무'와 같이 '지리산둘레길'순례를 시작했다.  큰 산아래 큰물이 지고, 큰 하천이 생겨난다고 지리산 아래 오랜 세월 물살에 씻긴 바위가 아름답게 강바닥을 이루고 있는 인월천은 넉넉한 품모를 가지고 있었다. 큰물이 진 흔적을  담고 있고 언제라도 다시 큰물이 지나가도 좋을 넉넉한 인월천을 따라 지리산 둘레길은 '중군리'로, 황매암과 수성재로, 그리고 배너미재를 넘어 첫날의 기착지인 장항마을로 이어졌다.     






길을 걸으며 '길'이 무엇인지, 길을 왜 걷는지 끊임없이 곱씹어 생각했다. 길을 걷는 것은 욕망을 가라앉혀 마음을 쉬게하고 다리를 놀려 몸을 다스리는 수양이자 구도의 과정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날의 걸음은 '새길을 만들기 위한 벤치마킹'이라는 목적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탓인지 끝없이 길에 대해 고민으로 채워졌다. '길은 삶의 흔적'이고, 삶의 흔적은 원초적으로 폭력적이기에 어쩌면 길은 인간의 폭력성의 흔적인지도 모른다는 강사의 문제제기가 귓전에 맴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걷기길'을 만들고, 또 걷는가? '현대 과학기술에 의한 극대화된 폭력(도로)을 인간의 원시적 건강성에 기댄 작은  폭력(걷기길)으로 치유한다'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걷기길의 가치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의 복원을 통해 무너져가는 농촌마을공동체를 살리는 데에 있다. 마을과 마을의 소통, 농촌과 도시와의 교류, 주민과 주민간의, 주민과 도시민간의 소통이 가져올 활력이 기대되는 그런 길이 아니라면 일반적인 등산로나 도시주변의 산책길, 관광지의 일반적인 관광코스와 다른 바가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리 단순한거 같지 않다. 과연 지리산 둘레길이 지나는 마을이 둘레길을 찾는 발길이 늘어남으로써 활력을 찾고 공동체성이 강화되었는가, 그리고 앞으로 계속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하는 물음에 긍정적 답변을  바로 내어놓기에는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마을방문객이 늘고 민박수요가 늘어나면서 마을내 긴장과 갈등이 늘고 마을의 풍광마저 변해버릴 위험에 노출되는 예들을 무수히 보아왔기에  드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길을 통한 이익없이 마을을 길가에 내어놓는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일 아닌가.  그렇다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개발이익'에 대한 기대를 전면에 내세워 '걷기 길'을 만들고 관광상품화에 성공한다고 그 길이 지역주민의 삶에, 마을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올 것인가 확신할 수 없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고 또 길은 길대로 이어져 우리의 걸음은 계속되었다.  잠마철에 걷는 산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무더운 날씨에 숲속가득한 습기속을 걷자마자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일행중 두어명이 더위에 지쳐 빈혈을 일으켜 잠시 긴장하가도 하고 걸음이 지체되기도 했다. 하지만 넉넉한 지리산의 품속을 거닐며 한껏 산기운을 들이마시며 두눈 가득 산하로 채우고 있는 시간은 행복했다.  


이날의 걸음은 짐을 풀고 휴식과 잠을 청할 '장항마을'에서 끝이 났다. 마을 이장님의 배정에 따라 일행은 각자의 민박집으로 흩어지고 마을은 이내 산그늘속으로 둘어갔다. 어둠이 마을을 덮고 멀리 개짖는 소리를 느끼며 빠져드는 잠은 행복했다. 걷기가 주는 육체적 피로감조차 길이주는 축복 임을 절감하며 나의 지리산길과의 첫 날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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