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28 유교문화재단 봉화군 포럼
마을문화자원의 발견 - 비나리 초롱계
초롱계의 재생이 마을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까?
비나리마을학교
초롱과 주민의 삶
초롱은 어둠을 밝히는 수단이다. 초롱이 있어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올 때, 온기를 지키며 생명을 보존하던 ‘방’이라는 작은 공간에 스며드는 어둠을 물리칠 수 있었다. 어쩌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고샅길을 걸어 이웃나들이라도 해야 할 급박한 처지가 되면 초롱은 어둠을 가르고 길을 여는 없어서는 안 될 생활 기구였다. 하지만 전기가 없던 시절 초롱은 지금 우리가 느끼는 정도의 가치를 지닌 하나의 등불이라는 연장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초롱이 담고 있던 것은 단순한 조명기구의 의미를 넘어 삶의 온기, 인정, 안녕, 평화 이 모든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따스함을 이웃과 나눌 때는 공동체 전체를 밝히는 어떤 삶의 지표, 공동의 가치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 승화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비나리초롱계란 무엇인가?
[초롱계]는 그와같은 초롱의 의미가 마을공동체의 삶속에서 구체화된 하나의 제도였을 것이다. 전쟁이나 난리, 돌림병이나 자연재해 같은 재난이 닥치지 않았을 때조차 먹을거리마저 넉넉하지 못했을 산골 마을의 삶은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선 아슬아슬한 하루살이의 삶과 진배없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삶의 조건 속에서 누대를 지나며 축적된 삶의 지혜는 더불어 사는 삶의 틀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마을을 지키고 삶을 보전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제도를 만들었을 것인데 초롱계는 그와 같은 공동체적 삶의 존속을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결과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초롱계는 비나리마을은 물론 인근 고계리 등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전통이다. 전기가 없던 시절, 큰일을 치루는 이웃에 초롱불로 부조를 하던 아름다운 풍습이다. 이웃에 상이나, 혼례가 있으면 온 마을이 집집이 한손에는 두부나 떡을 해 들고, 또 한손에는 초롱불을 들고 큰일을 치루는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웃을 도와 가며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나마 마음 넉넉하게 살아올 수 있게 했던 아름답고 지혜로운 전통이었다. 이웃의 도움으로 큰일을 치룬 주인은 그뒤 자신의 사정에 맞춰 적당한 금액의 돈을 초롱계 기금으로 내어 놓기도 하고 그렇게 모인 돈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운영되어왔다.
비나리초롱계의 현재
새마을운동으로 전통 공동체 문화가 쑥대밭이 되기전인 1970년대 초까지 이어져오던 초롱계는 그뒤 마을의 쇠락까지 겹쳐 그 흔적만이 남아있다. 현재는 동네 상여계와 합쳐져 그 본질적 내용은 유실되고 외형적 흔적만 겨우 유지되고 있다.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게 되는 변화는 마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일대 사건이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무엇보다 초롱의 의미, 초롱계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 뒤부터 초롱을 부조하던 전통은 사라지고, 초롱계의 형태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상여계’는 동네에 상이 났을 때 상주가 상여꾼에게 주는 노잣돈을 밑천으로 마을주민의 편리향상을 위한 다양한 일을 하는 기금을 조성하고 관리하는 계다. 상여계의 기금은 기본적으로 여러가지 마을행사 비용이나 마을 공용 비품을 조달하는데 사용하고, 그러고도 남는 기금은 마을 주민중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정한 이자를 물게 하고 1년단위로 빌려주어 기금을 유지하거나 불려나간다. 언제부턴가 비나리마을 초롱계는 마을 대소사 중 장례만 해당하는 상여계와 통합되어 구별되지 않게 되었지만 '초롱계'라는 이름만 남아 내용적으로는 상여계로 변형되어 전승되어 오고 있다.
올해도 음력 섣달 25일이 되면 어김없이 비나리마을 초롱계가 열린다. 그날은 마을주민이 모두 마을회관에 모여 작년에 빌려간 기금을 이자와 함께 모으고, 지난 일년간 동네일로 쓴 금액을 제하고 나머지를 다시 필요한 주민에게 빌려주고, 그 모든 내용을 기록하고 서명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친다, 그리고 나서 준비한 술과 음식을 나누며 주민 모두가 하루를 더불어 즐길 것이다. 하지만 비나리초롱계는 그 본질적 의미는 물론이고 그 외형마저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이다. 먼저 기금의 원천이 되었던 상여를 메지 못한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마을에 상이 나도 상조회사 같은 업체가 마을주민이 주도하는 상여계를 대신하게 되었다. 더 이상 기금은 들어오지 않고 지출은 계속하다보니 비나리마을 초롱계 기금은 고갈직전이다. 기금의 고갈은 단순한 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을 제도의 존속을 위한 순환체계가 붕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이 나도 상여 맬 젊은이가 귀하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마을주민의 의식도 ‘합리화’되었다. 굳이 마을 상여계에 상을 맡겨 비용을 지불하는 것보다 상조회사에 더 적은 비용을 주고 깔끔하게 맡겨버리는 걸 더 선호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상여계가 붕괴되는 과정이 지난 10여년 동안 진행되었다. 10여년 전만해도 동네에 상이나면 주민이 모두 상여꾼으로 나서고 상주가 내어놓은 노잣돈은 초롱계 기금으로 모였다. 하지만 마을에 인구가 줄고, 특히 상여를 맬 청장년이 줄어들면서 상여멜 최소 인원이 충당되지 못하자 초롱계 기금으로 모으던 노잣돈을 상여꾼의 일당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더나아가 얼마남지 않은 기금이 고갈되어가자 기금이 형성되는 데 오랜 기여를 해 오신 어르신을 중심으로 기금을 나누어 쓰고 없애버리자는 의견이 나오고 이 때문에 몇년간 논란이 이어지기 했다. 이제는 상여계의 중단, 초롱계의 소멸이 마을의 소멸로 나아가지 않을까 걱정해야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초롱계의 부활-비나리초롱축제
‘초롱계’는 ‘마을 동제’와 함께 마을을 유지 존속케하고 주민을 통합시키는 데 있어 양대축으로 자리매김되어 왔다. 마을동제가 동신을 중심으로 주민의 의지를 모아 신의 영역에 마을의 삶을 의지케했다면 ‘초롱계’는 마을 주민 스스로 자신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삶속에 체현해 나가던 제도이다. 마을 초롱계의 형식은 세월따라 바뀌었지만 이웃의 대사에 초롱을 부조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담고 있던 가치와 정신은 여전히 부식될 수 없는 핵심으로 남아있다. 그 가치와 정신을 마을살이의 여건 변화에 맞춰 새롭게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 '비나리 초롱축제'로 새롭게 태어났다.
몇년전 비나리산골미술관 개관식에 맞춰 초롱을 부조하는 초롱행렬을 개관식 참가객과 주민이 함께 재현한 적이 있다. 하나의 문화 이벤트로 시각적 아름다움을 재현해본 초롱핼렬이었지만 세월따라 알게 모르게 침체되고 생기를 잃은 마을이 수많은 초롱행렬로 아름답게 되살아나는 벅찬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뒤 초롱행렬의 재현은 연년이 이어지지 못하고 예산의 벽에 부딪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끊어진 초롱행렬을 비나리마을을 중심으로한 청량산 인근마을과 더불어, 주민과의 연대와 소통에서, 마을과 마을의 연대와 소통을 이루는 축제의 장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소멸되어가던 마을이 비나리초롱축제를 매개로 활력과 신명이 넘치는, 사람사는 마을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것이 마을이 가지된 하나의 작은 꿈이다.
지난 70년대 [새마을운동]이라는 관주도 마을 재생사업이 나름의 성과와 많은 부작용 속에서 마무리 된 뒤 마을 공동체 사업은 실제적으로 중단되어 왔다. 그뒤 지난 10여년간 비나리마을을 위시한 청량산권역 마을들은 마을자치역량을 중심으로 민간이 주도하고 관의 보조를 받아 마을의 경제적 부흥을 위한 다양한 마을 사업을 진행하여 왔다. 이제는 마을 사업의 한축인 경제적 부흥과 더불어 또 다른 마을 사업의 한축으로 마을 공동체의 정신, 마을공동체의 가치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비나리마을 초롱축제의 재생은 그와같은 마을공동제의 가치와 정신을 새롭게 구축하고 실현해 나가기 위한 의미있는 마을운동의 일환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