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훈갤러리에서 가져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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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갤러리기획]류준화개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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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굴 우화, 그 이후: 소녀의 탄생
나는 주로 대중 잡지나 광고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내가 의도하는 이미지로 다시 만들어 내고 있다. 잡지나 광고 이미지에서 에로틱한 여성의 신체 일부를 새의 날개처럼 표현하기도 하고 물고기의 꼬리처럼 보이게도 하여 남성적 시선에 고정된 여성의 전형화된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의 독립적 욕망을 담아내고 있다. ... 하지만 쏟아지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자유롭기란 어렵다. 나는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조차 이미지 안에 머물러 있음을 동시에 ‘보여 주고자’ 한다.(강조: 필자) 여성의 욕망은 류준화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화두 중의 하나다. 비교적 작업 초기에 해당되는 <그녀의 침묵>(2001)전에 부친 위의 말은 <Spring>(2011)전에 이르기까지 이후 이어지는 그녀의 작업 모두에 대한 일종의 각주처럼 읽힐 수 있다. 국가주의-가부장제-자본주의가 통치해온 여성의 실존에 빗금처럼 그어져 있는 (그래서 그 상징계가 기획한 그 ‘여자’의 주체성을 실패로 이끄는) 자유의 욕망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 트랜스포머처럼 자신의 신체 일부를 새의 날개로 물고기의 꼬리로 변형시켜 이 상징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여성들. ‘이미지로 호명되면서 삶을 얻지만 또 그 이미지를 벗어나고픈 독립적 욕망, 그 경계지점’에 서 있던 초기의 작업세계가 돌파구로 찾은 것이 바로 소녀-새의 존재태다.
2. 류준화의 소녀는 누구인가? - 없거나 하나가 아닌 여성주체들
치렁치렁 자라고 흐르고 날아다니는 머리카락으로 (특히 여성과 관련된) 상형문자를 형상화함으로써 기존의 가부장적 상징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기호계를 구성하는 문자도(文字圖)까지 포함해 류준화는 오랫동안 다양하게 소녀들의 형상화에 주력했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는 소녀 형상화가 드디어 어떤 ‘세계’ 즉 ‘소녀 우주’라 일컬을 수 있는 경지로까지 나아갔음을 확인한다.)
소녀는 일반적으로 아이와 여성의 사이 공간 (in-between), 문지방의 공간에 위치해 있는 존재다. 소녀가 불러일으키는 매혹과 두려움은 소녀의 이런 문지방적 성격에서 나온다. 소녀들은 급격한 사회 변동기에 아방가르드의 상징적 위치를 부여받는다. 한국사회에서 촛불집회 때 실제와 상징 양측에서 ‘촛불소녀’가 보여주었듯이 소녀성은 사이공간으로서 특히 급격한 사회변혁의 와중에서 성공과 희망, 실패와 불안의 투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장소로 기능한다. 한국사회의 현실 공간 속에서 소녀들은 남아선호 사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전통적인 위치에서부터 테크놀로지와 팬픽, 야오이, 코스프레 등 대중문화의 선진적ㆍ유희적 소비를 통한 하위문화 주체로, 그리고 가출과 원조교제의 위험한/위협받는 성적 주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소녀는 또한 성적 폭력에 가장 빈번히 노출되는 사회적 약자로서 지식인 남성들의 감성적/감상적 자기 반성이 투영되는 타자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 소녀들이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사회의 순수와 오염을 상징하는 이 기표로서의 소녀들은 현실에서 또한, 오형근의 ‘소녀 연기’ 사진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무구와 유혹 사이에서 능수능란한 시이소 게임을 벌인다. 그렇다면 작가 자신에게 소녀는 누구인가?
어찌 보면 첫 자기 이해의 순간, 그 지점이 소녀 아닌 소녀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 생각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그 경계지점에서 소녀와 소녀의 감성이라는 게 생긴다고 본다. ... 자기를 알게 되고, 또 ‘자기를 알아가고 싶어 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지각하는 그 지점, 그게 바로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이승으로 돌아오는 바리데기의 지점일 거라고 생각한다.
각각 2007년, 2012년에 행해진 이 설명들에서 소녀의 ‘경계적’ 존재성은 현상적 차원에서 점차 여성의 ‘자기 이해’에 대한 존재론적 원형 이미지로 움직인다. 정체성의 관점에서 볼 때 소녀는 이후에 전개될 삶의 모든 국면들을 품고 있는, 혹은 관통하고 있는 어떤 단단한 핵 같은 것이다. 여기서 나는 소수자 감수성이 뛰어난 소설을 쓰는 쓰시마 유코가 ‘남자’와 ‘소년’에 대해 한 말을 떠올린다. ‘남자는 부재한다. 남는 것은 남자 속에 계속 살아있는 소년이거나 아니면 사회적인 관념 그 자체일 뿐이다. 사회적인 관념으로 화하여 살고 있는 남자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서 묘사하는 것은 헛수고라는 기분도 든다’고 그녀는 말한다. 소년이거나 사회적 관념 그 자체이거나, 둘 중의 하나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소녀면서 여자로, 여자면서 소녀로 살 수 있다. 가부장적 언어체계 안에서 여성은 남성/성을 설명하기 위한 기호로 작동한다. 많은 여성주의 철학가들은 그래서 ‘여성에겐 성이 없다’고 말하거나(모니크 위티그), ‘여성주체는 없다. 만약 여성이 주체라면 주체는 하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뤼스 이리가레). 모든 담론이 남성중심의 의미경제 체계 안에 갇혀 있다면 그 안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그 어떤 주체적 위치성도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남자는 소년이거나 사회적 관념 그 자체일 뿐이지만, 여자는 소녀이면서 수많은 여자들로, 즉 하나가 아닌 주체로 존재한다. 류준화의 소녀는 그래서 현실적 연령을 가늠하기 어려운 몸과 표정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수많은 여자들로 존재하기까지, 그토록 슬프고 괴기어린 “초록날개”(2007)에서 “새”(2007)로 변신하기 시작해 그토록 단단하고 고요하게 생명을 창조하는 “물의 시간”(2009)에 이르기까지, 이번 전시가 보여주듯이 아예 거대한 꽃들의 대지가 되지 않고는 못 배기는 환희의 지경에 이르기까지, 류준화의 소녀들은 폭력과 희생, 분노를 숨기면서 드러내고 (드러내는 것조차 금지되었으므로), 드러내면서 숨겨왔다 (기존 재현 방식의 일의적ㆍ투사적 수용에 저항하기 위해). 그렇게 소녀를 소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즉 여성들을 ‘스스로 이해한 자기’로 살지 못하게 하는 폭력적 현실을 무대화했다.
본격적으로 여성/주의 그림을 그리기 전 대학시절에 작업한 그림들에서는 그 기괴함이 더 강하다. 구체적인 형상은 없는 추상화들인데도 그랬다. 내 안에 분노들이 많았던 것 같다. 사실 내 그림 속에는 엄마의 한들이 서려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추상적인 형상들 속에 내가 담고 싶은 그 분노의 내용들을 숨겼던 거다. 그 때도 역시 내 머리 속에는 늘 약자에 대한 생각이 있었고, 그 약자의 대변인으로서 항상 어린 아이를 담았던 것 같다 ... 추상적 형상 속에. 휠체어 탄 아이를 넘어뜨리는 어른같은.
휠체어 탄 아이를 넘어뜨리는 어른. 망설임 없이 작가의 입에서 나온, 그만큼 작가의 마음속 깊숙이 새겨져 있음에 틀림없는 (‘도가니’ 현상이 보여주듯 장애소녀에 대한 폭력은 사실 한국인 모두의 무/의식에 새겨져 있다.) 이 이미지는 인간사회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폭력의 어떤 원형적 이미지 같은 것이다. 그녀의 전 작업과정은 말하자면 폭력의 원형적 희생 이미지 소녀에서 죽음과 삶 전부를 껴안는 여성적 생성의 원형적 이미지 소녀로 변화해온 셈이다. 그리고 이 변화의 과정은 제의적 아우라에 둘러싸여 있다.
첩첩산중 두메산골에 살던 어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에는 늘 폭력에 희생당하는 여자들이 등장했다. 어머니들이 모여 앉아 나누던 이야기도, 실제 삶도 그랬다. 어머니 주변에, 내 주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던 여자들이 많았다. ... 그때 어머니는 촛불 켜놓고 공양을 드리며 신들을 모셨다. 신들을 모시던 어머니의 행위는 내게 익숙했다.
이렇듯 류준화의 소녀 그림들은 예술이 한편에서는 아직 종교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에서 분리되지 않았던 시기의 예술-자연-종교의 관계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그녀의 이미지가 상상계로서의 설화적 세계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한은 “실현되지 않은 욕망들”이다. 류준화가 불러낸 이 소녀들은 실현되지 않은 바로 그 욕망들을 품고 귀환하는 여성들이다. “출항”(2009)이라는 그림을 보자. 배 위에 노를 잡고 있는 한 소녀가 있다. 뺨은 상기되어 있고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린다. 당차고 늠름한 자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소녀는 떠나는 게 아니라 이제 막 도착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경우 류준화의 소녀들에게서 ‘출항’은 이렇듯 떠남과 귀환의 이중적 움직임으로 표현된다. 귀환으로서의 떠남, 떠남으로서의 귀환. 떠남과 귀환의 이 겹침은 의미심장하고 매우 실존/주의적이다. 이 겹침은 설화의 세계와 역사적 현장의 겹침이고, 원형적 이미지를 개별적 ‘사건’으로서의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겹침이다. 지워지고 침묵된 욕망으로 피흘리던 소녀들이 차례로 불림을 받아 ‘지금 여기’ 역사의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3. 이주의 시대, 소녀-이방인의 환대
이동 중의 사람들 ...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고 기억하고 싶기도 하고 지워버리고 싶기도 한 경계 위에 서있는 자의 감성을 표현하고 싶은 거였습니다.
소녀와 새에 관한 오래된 전설이 하나 있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로,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전승되던 아주 슬프고 잔혹한, 그러나 전율과 매혹으로 빛나는.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러 먼 길을 떠나야 했다. 그 길은 너무 멀어서 소녀는 날개가 필요했고, 소녀를 등에 태우고 강과 들판 위를 나는 새는 굶주린 배를 채울 고기가 필요했다. 소녀는 새에게 자신의 팔과 다리를 떼어 주며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류준화의 “발 없는 새” 소녀 그림이 있다. 그 그림 속에서 소녀는 발 없는 새를 오른 팔로 안고 있다. 그녀의 허리께에 착 붙어있는 그 새는, 소녀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소녀의 욕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발 없는 새와 날개 없는 소녀가 만나면 새는 발이 생기고 소녀는 날개가 생긴다. 소녀-새가 탄생한다. 이 그림을 두고 작가는 인터뷰에서, 계속 날기만 해야 하는, 발이 없어 쉴 수 없는 새를 한 소녀가 쉬게 해 주는 것처럼 자신의 그림들이 이동 중에 있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불균등 발전 때문에,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좇아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 중이다. 근대 이래로 이주는 일국의 차원에서, 지구적 차원에서 언제나 있어왔다. 그러나 기술, 통신, 초국적 자본, 미디어 등이 촉발하는 당대의 이주는 더 이상 비서구에서 서구로의 일방향이 아니라, 아시아 내에서, 혹은 비서구와 서구 간의 쌍방향으로 진행되면서 특히 이방인과의 삶에 익숙하지 않았던 한국사회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류준화의 “발 없는 새”는 모든 이동하는 이들, 이방인들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여기서 “하나가 아닌 주체들”로서의 소녀는 성별을 벗어나 아무 곳에도 정착할 수 없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모든 곳에 정착할 수 있는 이방인들의 정체성으로 확장된다. 사람마다 소녀-새를 바라보고 교감하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시대적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발 없는 새’의 비행을 이방인과 환대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촉구한다. 인류학적 관찰이 증명하듯이, 그리고 데리다가 역설하듯이 모든 이방인은 환대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손님을 맞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의 이 환대권에 응답해야 할 책무를 지닌다. 이 응답은 손님과 적의 바로 그 경계에서 이루어진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방인을 손님으로 인정하고 환대하는 것, 이것은 개인과 국가의 차원 모두에서 당대가 요구하는 가장 급진적인 정치학의 하나가 될 것이다.
우주인의 관점으로 이 지구를 봤을 때 나는 물이 제일 신비롭다고 생각한다. 물처럼 신기한 게 없는 거다. 생긴 모양도 너무 특이하고. 잡혀지긴 하는데 잡히지 않고 경계가 없고 그러면서 투명하고 ... 마실 수도 있고. 또 그 안에 모든 영양분이 다 들어있고 ... 너무나 성스러운, 너무나 흔한, 누구에게나 흘러드는, 누구에게나 세례를 베푸는 물. 이 물의 감흥이 나를 키웠다.
류준화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물의 성스러움에 감염되어 있다. 이 감염의 결과는 ‘덩어리’로 등장하는 소녀들이다. 이전에도 여러 소녀들이 물속을 유영하거나 여행하는 그림들이 있었지만, 지금 거침없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솟아나고 있는 이 소녀들처럼 이렇게 무리지어 나타난 적은 없다. “대지의 꽃”, “봄의 소리”, “달의 정원”, “검은 땅” 등등 - 그렇다. 광대하게 펼쳐지는 “봄의 제전”이다. 이 작업들은 물의 성스러움과 생성의 황홀에 전율한다. 여전히 소녀들의 몸에서는 크고 작은 날개가 솟고, 꽃들은 피흘리며 만개한다. 소녀는 어머니와 딸로 증식하고 개와 사슴이 소녀의 곁을 지킨다. 소녀들은 오체투지를 하고 기도를 올리며 애도에 잠긴다. 사막을 횡단하는 중인가? 소녀의 곁에 선인장들도 무성하다. 그리고 엉키고 설킨 덩어리로 나타나는 소녀들. 이 소녀들은 더 이상 예전의 설화적ㆍ알레고리적 소녀-여성의 모습을 띠고 있지 않다. 머리카락이나 표정에 있어 현실세계의 구체적인 개별 얼굴들을 하고 있다. 이 변화는 봉화에 내려와 살면서 류준화가 경험한 ‘자연세계’의 우주적 생성과 무관하지 않다.
자연에는 끊임없는 반복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자리에 똑같은 풀이 나고 ... 그러나 그러면서 조금씩 자기의 씨앗을 번식시킨다. 자연을 계속 접하다보면 여자의 몸과 닮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더라.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여자의 시간이 자연의 시간과 마찬가지라는 거다. 신비롭고 영적이다. 우주적이다. 꽃망울이 알아서 터지면서 씨앗을 흩뿌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 긴 겨울동안 또 다른 생명을 키우기 위해서 시간을 축적하는...
류준화는 화가다. 화가는 색과 형태의 스케일에 민감하다. 광대한 스케일에 대한 욕망은 예술가적 추동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모든 스펙타클이 드 기보르가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지적한 이데올로기적 문제점들로 귀결되는 건 아니다. 문화정치, 문화전쟁의 시대에 주류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 문화산업과 결탁해 무차별하게 확대시키는 스펙타클한 문화생산품들, 행사들에 대항해 반문화적(counter-culture) 행동으로 기획되는 스펙타클도 있다.
저렇게 소녀들이 군상으로 나오면 그 소녀들이 품는 기들이 있을 거라 생각한 거다. 소녀들의 그 기들이 자연이 내뿜고 있는 생명의 기운들을 보여줄 거라 생각한 거다.
이처럼 화가 류준화는 문화산업이 만들어내는 ‘소녀 시대’와는 다른 소녀 세계를 꿈꾸고 있다. 이 소녀 세계가 펼쳐 보이는 봄의 축제는 ‘봄의 제전’이 거대하고 풍요로운 봄의 생성을 위해 어떻게 소녀들을 희생제물로 바쳤는지 잘 기억하고 있다. 꽃의 한가운데를 파먹는 새들의 모습이나, 늘 피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꽃들, 발 없는 새 - 이 모든 형상들을 품고 있는 제전이고 황홀이다. 여기서 소녀들과 사물들은 서로에게 ‘나타남’으로써 ‘존재’하는 세계 내적 존재인 세계 관객‘들’로서 세계 관객‘들’인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다. 우주적 경이를 품었으되 초월이나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생명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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