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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소위 '고추파동'이 났다. 기억을 되살려보면 내가 살던 진해서는 아예 국내산 고추를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던것 같다. 어머니가 고추를 사지 못해 걱정하시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고, 결국 인도, 멕시코 등으로 부터 수입했다는 모양도 다르고 맛도 맵기만 한 이상한 고추를 평년의 고추값보다도 더 비싸게 사서 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까마득이 잊었다. 내 자신이 농사꾼이 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1년에 우리가족이 고작해야 5근의 고추도 먹지 않는 식생활의 변화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나는 얼치기 농사꾼이 되어 벌써 15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고추값은 내가 고추농사를 하든 말든 매년 가을만 되면 나의 주관심사의 하나가 되었다. 고추값은 이곳 산골 농민의 1년 생계가 달린 문제고, 그에 따라 당연히 지역 상가의 경기와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1997년 IMF로 온나라가 들썩이던 그 때, 내가 들어와 살기 시작한 비나리마을은 IMF보다도 고추값 폭락으로 더 고통받고 있었다. 고추 상품 1근 600g가격이 2,200원전후로 형성이 되면서 끝물 고추수확을 포기한 집이 한집두집이 아니었다. 그해 고추수확에 나선 할머니들의 하루 일당이 20,000원에서 22,000원 정도 였으니 하루 일당으로 약 10근의 상품 건고추를 받아가는 셈이었다. 숙련된 한명의 인부가 하루수확하는 건고추 양이 약 40~50근 정도이고, 또 인부들은 따로 교통비를 지불하고 인근의 영주 등으로부터 매일 공수해 오든지 아니면 아예 가을 내내 불러서 같이 지내면서 먹이고 재워야했기 때문에 인부를 사서 수확을 하느니 차라리 하품은 수확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추값 폭락의 와중에 고추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사고속에서 하나의 로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른바 "1978년 고추파동의 추억"이었다. 

1978년 도시에 살던 우리 가족이 고추를 구하지 못해, 아니 고추 살 돈이 없어 헉헉되던 시절  고추농사를 짖던 분들은 일생에 다시 못올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고 한다. 고추 한근을 보자기에 싸서 봉화장엘 들고 나가 팔면, 이런저런 부식거리도 사고, 고무신도 사서 들어오는 길에 선술집에서 막걸리한잔을 하고도 돈이 남았다고 했다. 도대체 고추한근이 얼마였기에 그럴수 있었는가하면 그때 가격으로 무려 만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대충 6~7만원으 족히 될것이다. 그러니고추 한근이면 충분히 그럴말한 값어치가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죽기 1년전, 한국 농촌에 선물로 남긴 것이 바로 고추 1근 1만원의 신화다. 이는 새마을운동이란 무기로 한국 농촌공동체를 해체한 일등공신인 박정희가 아직도 옛어르신의 뇌리에 위대한 지도자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하는데 적지 않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직도 '그때가 좋았는데...'를 읊조리는 어르신은 꼭 고추 한근 1만원의 신화를 입에 올리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 33년만에 다시 '고추파동'이 났다. 하지만 이번 고추파동은 평년작의 50% 이상 감수한 1978년 정도의 파동에는 미치지 못하는가보다. 오올해  평년수확량의 약 34% 정도가 감수된 전망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격면에서도 1978년의 만원은 지급 가격 2만원의 족히 3배이상의 화폐 가치를 띤다고 볼 때 올해의 고추값 상승은 '고추파동'이라고 이름붙이기에는 조금 지나치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올해 고추 수확예상량은 평년보다 약 34% 정도 감수된 7만9천여톤으로 보고 있다. 신문들을 보면 현재 소비자 가격은 약 2만원 정도로 형성되고 있는데 정부의 개입으로 매주 400여톤, 총 8,000여톤의 정부물량이 시장에 풀릴 것으로 보이고, 또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추석이 지나면서 고추값이 하락세로 접어 들것이라는 기사가 넘쳐난다.

이들 고추 관련 기사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의 전제는 현재 형성되고 있는 고추가격이 지나치게 높다는 사실이다. 경제 대통령이라는 MB가 국가 경제를 파탄시키고 물가고로 서민의 목을 죄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아무리 농민이지만 지나친 농사물 가격상승은 바람직하지 않다는데 동감한다. 하지만 올해 고추가격과 수확량을 감안하면 평년에 비해 농민이 얼마정도 경제적 이익을 보았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산량 감소에 따른 가격 상승은 시장경제의 신봉자들인 그들에겐 '공정'하기 이를데 없는 현상인데, 농산물 가격하락에 그렇게도 둔감한 정부가 가격 상승에는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니 참 어이가 없다.

아뭏튼 나는 고추의 생산 전과정을 소상히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한국 농촌공동체의 유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고추 한근 2만원은 결코 지나치게 비싼 가격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라 믿는다. 곧 지나가버라겠지만, 나는  올해 처음으로 정상적인 고추가격을 기쁜마음으로 목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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