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밭에서 읽는 책

갈수없어 더 절실한 시절에 꾸는 여행의 꿈

허재비 2021. 1. 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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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소수의 선택된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교통수단이 늘고, 나름 생할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여행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신비가 발가벗겨진 여행은 조금 비싼 오락 상품이 되었고 광고 등 대중매체에 의해 부풀려진 욕구에 따른 소비행위로 추락했다. ‘착한 여행’, ‘공정 여행은 이렇게 추락한 여행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한 안간힘이었지만 우리는 늘 여행에 앞서 윤리적 자의식 앞에 일순간 망설임의 시간을 가져야했다.

[여행의 기술]을 읽으면서 나는 훼손된 여행의 정신이 오롯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알랭 드 보통은 상업성이 배제된 여행 본연의 모습을 넓은 예술적 교양과 깊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 회복한다. 이를 통해 필자는 여전히 여행이 우리의 삶을 고양하는 의식이고 우리의 영혼에 자유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수행임을 확인시켜준다. 덕분에 의심받던 여행의 결백은 증명되었고, 여행의 특별한 권한을 복원되었다.

여행은... 일과 생존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풍경을 요구한다.”

가정적 환경은 우리를 일상생활 속의 나라는 인간, 본질적으로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인간에게 계속 묶어두려고 한다.”

“... 두려움 등 회피정서... 음악이나 풍경은 이런 부분이 잠시 한눈을 팔도록 유도한다.”

알랭 드 보통은 위의 명제들을 증명하기 위해 특정한 주제와 풍경과 인물을 연결한다. “기대라는 관념과 바베이도스라는 장소와 위스망스라는 인물을 연결하고, “호기심 마드리드라는 장소와 알렉산드 폰 홈볼트라는 인물을 연결한다. 전부 9개의 주제를 장소와 인물을 통해 이해하고 예술과 철학적 사유를 통해 고양한다. 스쳐지나가며 소비되던 풍경이 예술적 영감이 되고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 우주와 인간에 대한 사유의 깊이를 더한다. 나는 책을 읽기 시작하자 마자 작가의 예술적 인물학적 소양에 놀랐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와같은 교양과 지식을 장소와 엮어 의미를 산출하는 그의 인문학적 상상력에 더 탐복했다.

책을 덮고, 필자의 인도를 따라 나의 많지 않은 국내외 여행의 기억을 반추한다. 나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과 낯선 맛남을 통해 삶을 고양하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나를 억누르고 있던 마음의 짐과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나의 낯선 모습을 언뜻언뜻 확인할 수 있는 신비체험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여행은 풍경과 인문학적 지식, 삶과 철학적 사유를 아우르는 지적 편력일 수는 없었고 가능한 사유를 배제하고 오감에 몰입하는 감각적 여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알랭드 보통이 제시한 여행의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나의 감각적 여정의 가치를 인정하고 싶다. 소비로서의 여행은 좀더 고양될 필요가 있지만, 동시에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은 좀더 가벼워져도 좋을 것 같다. 나의 여행은 늘 소비와 그 사이 어디쯤에 있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하고 부수적이지만 아쉬운 점 두가지만 언급하고 싶다. 책값이 얼마나 올라갈지 모르겠지만 호퍼나 고흐 등의 작품을 칼라로 볼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PC를 통해 작품을 확인하다보니 책읽기가 자주 끊기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했다. 서인도 제도의 바베이도스나 영국의 레이크디스트릭트는 나에게 미지의 지역이다보니 이역시 PC에 의존해야했다. 소제 전체를 아우르는 지도라도 한 장 그려져 있었다면 책읽기 몰입도가 좀더 높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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