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우리의 새로운 상상력을 요구한다!
하노이 북미회담에 걸었던 대한민국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협상은 결렬되었고 비록 불씨는 남아있다고 하지만 한반도의 평화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불안한 상황이 되었다. 불쑥불쑥 내뱉는 북한과 미국의 협상 당사자들의 발언에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가슴 졸이며 불안에 떨거나 작은 희망의 불씨에 안도하기도 한다.
하노이 북미협상의 과정과 최종적인 결렬 원인에 대한 다양한 해설들이 난무하지만, 핵심은 미국이 의도적으로 판 자체를 흔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뼈아픈 것은 대한민국은 미국과 유엔의 제재 틀을 깨지 않음으로써 북한에 대한 간접적인 압박에 동참하고 있지만, 미국이 협상 결렬의 원인을 제공하는 상황에서는 미국에 대한 압박 수단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현실이다. 유엔을 앞세운 미국의 대북 압박은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수단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협상의 한 축인 미국이 협상에 성의를 보이게 견인할 수 있는 수단을 북한과 한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세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야 했듯, 전 세계적인 반전 평화운동이 가능하려면 북한이 일방적인 피해당사자가 되고 미국이 가해자가 되는 구도가 형성될 때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대응이 미국의 일방적인 위협에 대한 방어행위라 한다고 해도 ‘핵무장’이라는 군사적 수단으로는 국제사회 평화 세력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북한의 자발적인 핵무장해제가 한반도 영구평화로 가는 주요한 조건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북한으로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방안일 것이다.
그러면 가장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인 대한민국은 계속해서 미국의 입만 바라다보고 있어야 하는가? 사실 지금이 거의 그런 상황이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의지는 그것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국제 정세 및 국가 간 외교 관계를 결정 짓는 가장 현실적인 힘이다. 세계 핵무장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미국이다. 재래식 군사력 분야서도 가히 압도적이다. 세계 요소요소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고, 특정 국가의 핵무장조차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묵인하고 지원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핵무장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 후견자는 바로 미국이다.
하지만 미국의 국제질서 속에서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곧 현실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IS 부류의 대미항전은 반문명적 자살행위에 불과했다. 아니면 그 반대쪽 극단에서 펼치는 극우세력들의 주장처럼 미국의 후견 아래 대한민국의 운명을 통째로 맡기겠다는 것은 을사오적의 주장과 다름이 없다.
처음부터 상황을 짚어보면 북한이 핵무장을 추진하는 순간 재래식 전력에서 대한민국에 완전한 패배를 자인한 셈이다. 물론 경제적 측면에서의 경쟁은 벌써 끝났다. 북한과 남한의 체제경쟁은 이미 남한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상황은 북한이 핵을 안고 국제사회를 위협함으로써 체제의 유지를 도모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북한의 핵 협박전략은 강자의 침략야욕이 아니라 약자의 절박함에 기인한다.
말할 것도 없이 핵무장은 군사적 무기가 아니라 외교적 무기다. 북한이 핵을 짊어지고 산다고 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제적 번영과 체제 안정은 물론 인민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 사실을 북한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미래세대가 핵을 짊어지고 살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한 발언이 말해주는 바다. 그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선언이다.
제재 철회는 가역적인 데 반해 핵무장 해체는 불가역적인 상황에서 북한의 단계적 핵 해체 요구는 포기할 수 없는 입장이다. 문제는 미국이 과연 한반도 비핵화의 의지가 있는가 하는 데 있다.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가 아닌가가 결국 비핵화 협상의 행로를 결정지을 것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미국본토에 위협이 되는 북한의 ICBM을 해체하고 북핵을 관리하는 수준에서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군산복합체에 이익을 가져오고 대중국 기지인 일본의 무장을 촉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다면 미국은 그렇게 대북협상을 끌어갈 것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패권적 국제질서 속에서 보면 약소국에 불과하고 적어도 미국을 직접적으로 움직일 힘이 없다.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대중국 전략의 목적으로 그리고 이에 편승한 일본에 의해 북한이 이용되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떤 대응이 가능할지도 혼란스럽다. 평화를 향해 미국을 견인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공조를 활성화하고 북한의 자발적인 핵 포기가 가능할 만치 국제 안정 보장이 주어질 수 있도록 하는데 대한민국의 역할이 어디까지 가능할지도 알 수 없다.
어릴 적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 장면을 TV로 보면서 들었던 의구심을 다시 상기해본다. 국가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저렇게 절실한 가족들의 왕래를 수십 년 동안 가로막고 있을까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향후 남북 정부 간 협상이 교착에 빠질 때 어쩌면 민간에서 ‘무정부적’ 통일 운동이 진행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하지만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가 남북의 거리를 휩쓰는 낭만적인 장면은 그냥 상상일 뿐이다. 현실적 바램은 최악의 경우라도 남북이 상호 ‘접촉’과 ‘교류’를 이어가는 것이다. 남북의 공존과 영구평화 그리고 공동 번영이 우리 당대에 해결할 수 없는 과업이라면 최소한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영구평화는 평화라는 수단을 통해, 평화로운 시간의 오랜 축적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밀고 당기는 지난한 협상 과정이 문재인 정부 앞에 놓여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의 국익을 직접 침해하지 않으면서 대북제재를 잠식해 들어가는 미세전략을 가동해서 남북의 긴장을 해소하고 평화의 유지와 강화를 이루기 위해 시도해야 한다, 더불어 대한민국 내 극단적으로 갈린 북한에 대한 인식과 평화에 대한 관점을 일치시켜 국가적 협상력과 대응력을 높여나가기 위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때 북한이 국제사회를 향해 전면적인 핵무장해제와 국제기구의 검증을 수용하겠다는 선언을 내놓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본다.
참 힘겹고 먼 길이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경북북부지역토론회 지정토론발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