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밭에서 읽는 책

김정헌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을 가다]

허재비 2012. 5. 2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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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가 사는 마을’이란 어떤 마을일까? 그보다 먼저 필자가 이해하는 ‘예술가’와 ‘마을’은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필자는 어떤 '예술가'를 만나고 또 어떤 '마을'을 찾았을까?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김정헌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을 가다]를 읽었다.

 

이 책은 필자가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이라는 직을 부당하게 잃고, '중앙권력'의 저열한 아귀다툼에서 벗어나 마음을 다스리고 그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찾아 전국을 주유한 흔적을 담고 있었다. 물론 그는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돈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저런 인연이 닿는 예술가들을 찾아, 그 예술가들이 사는 마을을 찾아 길을 나섰고, 예술가가 없어도 그야말로 예술적으로(!) 활로를 찾고 활기를 일궈나가는 마을도 마다않고 방문했다.

 

그가 만난 예술가는 다양했다. 주민과 담을 쌓고 철저히 자신의 세계에 몰입하는 예술가도 있었고, 마을 주민과 더불어 마을의 잃어버린 생기를 예술을 통해 불어넣어보고자 시도하는 현장 활동가도 있었다. 그들 모두의 공통분모를 찾기는 쉽지 않았고, 그 모든 만남을 통해 얻은 결론도 쉬 정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술가 자신과 마을과의 관계, 마을살이 속에서 예술가 자신의 역할에 대한 자의식이 있든 없든 예술가가 사는 마을은 조금은 특별했다. 독자인 나는 그 특별함이 무엇인지 촉각을 곤두세워 필자의 걸음을 따라 이 마을 저 마을을 기웃거렸고, 이런 저런 예술가의 삶과 예술을 곁눈질 했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결국 '예술가'는 누구인가, 예술가와 민중은 어떤 관계여야 할까 혹은 예술가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같은 규범적 물음을 일단을 접어 두기로 했다. 그리고 또 이상적인 마을의 상, 예술을 매개로 한 공동체라는 이상향의 꿈을 접었다. 그것은 필자의 발자취를 따라 나서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내가 견지해 온 사회 속에서 예술가가 가지는 역할에 대한 관념적인 이해, 예술이 공동체적 삶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한 추상적인 이해를 잠시 밀쳐두기로 마음먹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술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으며 그 자체를 ‘향유’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존재 이유이며, 사회적 부정의를 고발하고 변화를 추동하는 발언으로 승화되는 지점에서 조차 선전의 도구가 아니라 예술적 향유가 근본이 되어야하는 게 아닐까, 또한 예술가는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지도자’나 공동체의 주류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사회에 변화의 염감을 불어넣는 불온한 아웃사이드이고, 아웃사이드이기를 포기했을 때라도 예술가는 가장 평범한 공동체의 일원이거나, 아니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예술가가 되는 지점이 바로 가장 이상적인 ‘예술가가 사는 마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찾은 [예술가가 사는 마을]이 뭔가 특별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는 현실의 예술 생태계나 예술가의 존재방식과는 조금씩 다른 다양한 길을 모색하는 생동감 넘치는 예술가들의 삶을 목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화를 넘어 세계화의 파고에 휩쓸려 ‘마을’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 가는 현실에서 ‘마을’을 새롭게 정립해서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일궈나가는데 있어서 예술이 마을 재건을 추동하는 영감을 촉발하는 그런 마을들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예술가다. 그가 꿈꾸는 마을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농부이면서 시인이고, 동시에 예술가고 철학자인 세상일 것이다. 그와 같은 마을의 연대로 이루어진 [마을공화국]은 인류가 오래 꿈꾸어오던 이상향이다. 이 책을 통해 마을공화국의 꿈을 현실화할 수 있는 단초를 끝내 찾을 수 없을지라도 나는 존경하는 필자의 생각을 이해하고, 더불어 많은 예술가를 만나그들의 마을살이가 어떻게 시도되고 있는지 그 궁극은 꿈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 만으로도 의미 있었다. 필자가 찾아 주었던  한 마을의 주민으로서 이 책을 읽고, 예술가와 농부의 구분이 사라진 세상, 마을과 마을의 경계를 넘는 어떤 곳에서 만들어질 마을공화국의 꿈을 가슴에 나누어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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