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훈의 "미셸 세르의 인식론 : 공존의 모색", [현대철학의 모험]
미셸 세르의 인식론 : 공존의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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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은 그의 제자이자 나중에 푸코의 스승이 되는 캉길렘을 통해 계승된다. 캉길렘은 바슈라르의 문제의식을 계승해서 이를 생물학의 영역에까지 확대하고 과학사연구의 인식론적 성격을 극대화한다. 그는 콩트의 세포이론 해석에서 바슐라르의 욕구/욕망범주를 보다 객관적인 사회정치적 범주로 전환했고, 이는 한 시대의 지식 형성에 개입하는 사회적 힘과 규율의 문제를 다루는 푸코 사상의 출발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셸 세르는 콩트의 ‘연속성’, 바슐라르의 ‘단절’과 다른 입장으로 과학의 진보는 인정하지만 ‘과학’이라는 단수의 용어로 묶을 만한 단일한 진리의 연대기적 축적은 없다고 보는 특이한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는 이성의 역할을 신뢰하고, 이성의 역할을 극대화할 것을 주장한다. 이 입장에서 세르는 바슐라르를 비판하는데, 바슐라르가 이성을 과학의 영역에 한정시키고 예술, 인문학 등을 몽상의 영역으로 밀쳐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르의 입장은 이성의 폐쇄적 절대주의로 나가지 않고, 개방적 합리성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는 한 체계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이성이 아니라 다른 체계들과 서로 작용하고 보충하는 이성으로서의 개방적 합리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 체계의 개방성은 자기체계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고 바로 그로부터 합리성이 나온다고 본다. 다시 말해 세르의 인식론은 전체로서의 체계라는 근대적 이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의 입장에서 한 체계의 절대적 완결성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체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르는 철학이 바다를 떠돌다 잠시 만나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고 보고, 영원히 정착할 안정된 대륙, 세계를 한 번에 구성해줄 철학은 없다고 본다. 바로 이점에서 세르는 맥루한과 비교되기도 한다.
맥루한은 ‘미디어가 메시지’라고 보면서, 모든 미디어의 ‘내용’이 또 다른 미디어의 ‘형식’이 되는 내용/형식의 상호 순환적 영향관계를 제기하며 궁극적인 기원, 최종적인 원형을 거부한다. 화자와 청자, 내용과 형식, 주체와 객체는 끊임없이 순화하며 상호 반전되는 관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맥루한의 입장은 기원의 신화를 해체하고, 기원을 통해 성립하는 닫힌 체계를 논박하는 세르의 입장과 상통한다. 다시 말해 중심은 끝없이 이동하기 때문에, 한 체계 내부의 교환을 모두 매개하고 제어하는 초월존재를 인정할 수 없지만 체계 외부의 끊임없는 유입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열린 구조는 소통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세르와 맥루한은 이질적인 매체, 이질적인 지식의 공존에 대한 입장에서 갈라진다. 세르는 맥루한과는 달리 공존의 관점에서 소통의 숨은 요소인 ‘소음’에 주목한다. 세르는 이 ‘소음’의 개입과 간섭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사유 발전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정보에 대한 입장에서도 세르와 맥류한은 갈라선다. 맥루한은 in-formation에서 ‘in’의 의미를 중립적인 질료를 형상 속에 ‘집어넣기’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세르는 ‘in’을 고정된 형상이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맥루한에게 개별 매체는 자기완결적이지만, 세르에게 매체들은 ‘이질동상’적이다. 세르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정보를 천사에 비유하며 소통하고 이동하는 정보자체의 특징을 드러낸다.
그런데 소통은 기본적으로 교환이며, 나름의 주고받는 규칙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규칙은 위반되고, 규칙을 위반한 요소는 ‘배제’되는데 여기에는 ‘초월’과 ‘축출’이 일어난다. 이상적인 교환체계는 이들 ‘기식자’를 효과적으로 축출함으로써 안전하게 닫힌 체계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완전한 축출은 불가능하고 외부와 내부에 걸쳐있는 기식자는 늘 상존한다. 이들 기식자는 체계의 안밖에 걸쳐 있으면서 한 체계의 외부를 지속적으로 체계의 내부와 공존토록 하고, 이를 통해 ‘새로움’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아가 한 체계의 붕괴와 새로운 체계의 생성을 낳기도 한다.
세르는 이와 같은 소음, 기식자, 제외된 제3자 같은 것들의 의미를 찾는다. 이들 ‘담론질서’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의 창조적인 성격에 주목함으로써 세르는 진정한 소통의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 아닌 것과 과학의 관계에서 바슐라르는 비대칭적 시각인 바면 세르는 과학 아닌 것에서 과학성을 읽고, 과학 속에서 비과학성을 있는 대칭적 시각을 보인다. 그렇다고 세르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지적 무정부상태에 빠지진 않는다. 그에게는 과학과 예술을 통일하는 근본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과학사가 참의 역사만은 아니지만 참된 개념을 만들어 가려는 노력들, 개념화 형식의 집합이다. 따라서 세르는 연대기적 순서의 과학적 진보, 사회적 진보는 존재하지 않지만 세계를 보다 포괄해서 보여주는 관점의 존재가능성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진보를 인정한다. 세르에게 시간개념은 비일적선적 개념으로 시간의 복잡성, 시간의 다발을 긍정하는 인식론으로 오늘날의 복잡성의 과학에 걸맛는 인식론이다.
세르의 인식론은 ‘정보유토피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세르의 인식론을 바로 인터넷 소통, 정보사회 차원으로 환원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위험을 무시할 수 없어보인다.
그리고 세르는 세계의 열린 구조를 이야기하지만, 세계지배질서는 여전히 닫힌 구조로 강건하게 유지 존속되고 있고, 닫힌 구조의 근원이 되는 계급구조는 고착화가 더 심각해지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세르의 지식의 세계-대수학에 바탕을 둔 열린 구조는 현실의 세계-자본에 바탕을 둔 닫힌 구조와 합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는 생각이지만 과학과 철학의 행복한 맛남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철학자의 과학에 대한 해석은 종종 이론이 아니라 인식의 과정에서 가지는 심리적 반응, 정서적 반응일 경우가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