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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아침 파노라마롯지를 도보로 출발 둘리켈 버스파크에서 버스를 탑승하여 박다푸르까지 가고, 다시 1km를 걸어 버스를 갈아타고 나가르곳에 도착하여 1박을 한뒤 20일 카트만두 타멜로 돌아와 이전 묵었던 카트만두 뷰띠그호텔에서 하루를 더 묵었다.  

 

예정에 없던 2박을 하게된 둘리켈 파노라마 롯지를 나오며 주인에게 거듭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물론 가격을 지불했지만 피우던 담배와 유심카드까지 신세를 지고 편안하고 평화로운 이틀을 묵을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했다.  한적한 아침 산길을 걸어 민가를 만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간혹 오토바이나 차량이 지나가기도 했지만 편안함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롯지를 나온지 얼마되지 않아 길가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지폐를 발견했다. 10여장의 지폐를 주워 세어보니 모두 245루피나 되었다. 한국돈으로 3000원 정도되는 돈이지만 공무원 한달 월급이 10만원 전후인 나라에서 하루 일당은 되는 돈이었다. 주운 돈을 다시 산길에 뿌려둘 수도 없고 어떻게 처리할지 고만하다가 지도상으로 우리가 가기로 예정된 코스안에 얼마되지 않아 경찰서가 있어 신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우리보다 더 난감한 것은 경찰같았다. 분실물에 대한 처리 규정이 없는 건지 바디랭귀지로 설명을 했지만 경찰서 정문을 지키는 경찰은 그 돈을 받을 수 없다고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곤혹스럽긴 했지만 경찰마저 인정해 주는 불로소득을 주머니에 넣었다. 나에게 둘리켈은 불안으로 시작해서 행복을 주고, 마지막으로 행운까지 선사한 멋진 도시로 남았다.

  


둘리켈에서 카트만두 방향으로 가는 버스는 많아 보였다. 티벳 국경을 넘는 Kodari고개에서 카트만두로 이어지는 Arniko Highway 상에 있는 둘리켈은 교통의 요지였다.  버스는 이어졌고 거의 기다리지 않은 채 바로 탑승할 수 있었다.  Panauti와 갈라지는 Banepa까지는 낯선 길이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래도 한번 지나갔다고 익숙한 길이 이어졌다. 박타푸르까지는 한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박타푸르에 도착한 지점은 나가르곳 가는 버스를 탑승하는 곳과 달랐다. 1km쯤 걷고 물어서 승객이 곽차 빈좌석이 없는 나가르곳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굴곡지고 가파른 오르막 길을 달려 나가르곳 종점에 도착했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우선 maps.me에 cafe du mont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찾아 나섰다. 소나무 숲속으로 이어지는 깨끗한 도로를 따라 1.2km를 걸었지만 길은 군부대로 가로막혔고 다시 되돌아 버스에서 하차한 지점에 이르러 방향을 되찾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행히 왕복 한시간여를 걸은 길은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포장도로로 양쪽으로 쭉쭉뻗은 소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어 시간내어 일부러 걷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좋은 길이었다. cafe du mont은  lonely planet에 소개된 Peaceful Cottage라는 호텔의 부속식당으로 독특한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괜잖은 음식과 조망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숙소를 다시 찾아나서기도 귀찮아 흥정을 통해 전망좋고 넓은 방을 50불에 묵기로 하고 일찍 짐을 풀었다. 나가르곳이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하다고는 했는데 역시 이정도의 호텔이 50불이니 분명히 싼것은 아니었다.   

 

 

둘리켈이후 3일째 호텔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이날도 빨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지난 여정을 정리하고 다음 일정을 계획한다는 핑게로 Lonely planet Nepal을 뒤척거리며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산책을 나왔지만 호텔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다가 호텔 옥상에 올라 바라다 본 해지는 히말라야는 참 인상적이었다. 둘리켈에서 바라다 본 히말라야가 조금 더 앞으로 다가온 듯한 느낌이 들었고 카트만두 인근 최고의 히말라야 뷰포인트라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울라기리에서 에베레스트 그리고 칸첸중가까지 다 조망권에 들어온다고 하지만 저산이 어떤 산인지는 구분할 필요도 없이 그냥 히말라야의 신령함에 압도될 뿐이었다.

 

과분한 호텔에서의 하루를 보내고 13식에 네팔리 한달 월급에 해당하는8960루피를 지불하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단지 그때문만은 아니겠지만 Nagargot은 나같은 여행자에게 적당한 여행지는 아닌 것 같았다. 단지 히말라야를 조망한다는 것 하나로 찾아 오기에는 다른 매력이 적었고, 관광지화된 마을은 네팔 산간 마을의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설화에 따르면 오래 전에 카트만두는 물이 가득찬 호수였는데 칼로 산허리를 쳐 물을 빼내어 지금의 도시 카트만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장본인인 문수보살이 3일간 머문 곳이 다름아니라 바로 나가르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설화는 재미있었지만 관광지다 보니 물가는 비싸고 대부분 시즌에는 번잡하기 까지 하다고 했다.  

 

호텔을 10시에 나와 버스파크에 도착하니 이미 만차여서 이번에는 11시까지 기다렸다가 좌석에 앉아 출발했다. 박타푸르까지 인당 50루피의 차비를 내고 다시 타멜행 버스로 갈아타니 인당 25루피의 요금을 요구했다. 저렇게 싼 요금으로 크고 깨끗한 버스를 이용해 여행할 수 있는 네팔이 새삼 고마웠다. 5일만에 돌아온 카트만두는 여전히 혼동과 소음, 먼지와 쓰레기의 천국이었다. 그 점이 싫거나 낯설지 않고 더 반가운 라트나버스파크에서 버스를 내려 타멜로 행했다. 어느새 카트만두는, 특히나 타멜거리는 나의 마음속에서 고향처럼 편안한 안식처로 변해 있었다. 한식당인 경복궁을 찾아 오랜만에 김치지개와 제육뽁음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몇일 있으면 새로 합류한 일행이 있어 카트만두에서 지금까지 지내던 숙소를 새 숙소롤 옮기로 결정하고 바로 새 숙소인 "마야거르츄"를 찾아 나섰다. 타멜 거리를 지나고 이전에 네팔짱이 있던 골목을 벗어나 북쪽으로 5분거리에 있는 "수어러 꾸떼" 라는 지역에 있는 National Star High School 까지는 잘 갔는데 바로 옆에 위치한다는 숙소는 한참을 더 헤멘뒤에나 찾을 수 있었다. "마야거르츄"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의미로 이전에 한국에서 노동자로 근무하면서 네팔 노동자의 인권 운동을 하시다가 추방당했다는 라미찬씨가 운영한다고 했다. 문재인씨가 네팔 트레킹을 할 때 머문 숙소로도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대문에서부터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리본이 걸려있는 것이 범상치않은 숙소로 다가왔다.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는 한국 상황을 외면하고 떠나온 여정이다보니 늘 마음에 무거웠는데  노란 리본이 반갑고 고마웠다.

 

마야거르츄는 조용하고 깨끗했고, 공동 운영하신다는 파샹님은 친절했다. 다음주에 합류할 일행의 예약상황을 확인하고 우리 부부도  안나푸르나 라운드와 숙소를 부탁하고 카투만두 뷰티끄 호텔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룸보이 빔센은 벌써 서먹해진 표정으로 우릴 맞았고 우리는 전체 일정의 3분지 1을 지나는 날의 저녁을 화려한 타멜거리의 레스토랑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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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6일 버스로 카트만두를 출발, 박다푸르, Sanga, Banepa를 지나 Panauti에서 일박을 하고, 17일 나모붓다사원까지  걷고, 히치하이킹으로 Dhulikhel까지 가서Panoroma View Lodge에서 2박을 함.

 

모두 떠났다. 지난 보름 같이 먹고 자고 걸었던 도반들은 먼저 귀국길에 올랐다. 허허로운 마음에 힘없이 타멜을 걸었다. 식욕도 없이 저녁을 떼우고 깊지만 불안한 잠을 잤다. 가볍게 찾아온 우울. 하지만 새벽 늘어진 의식을 깨워 본격적인 여정을 준비했다. 짱구나라얀과 파나우티, 둘리켈과 나가르곳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파나우티행을 결정했다. 박타푸르와는 또다른 중세문화가 있고 한적한 시골도시라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사전 지식이었다. 단기 일정인 만치 짐을 줄이기위해 두 개의 대형 배낭을 호텔에 맡기고 오직 50리터 배낭 한 개만 준비해서 길을 나섰다. 박타푸르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버스일 거라는 확신에 룸보이가 제안한 다른 길을 무시하고 타멜을 가로질러 1킬로미터나 걸리는 라트나버스 파크로 향했다. 행운이 따랐는지 오직 두 번을 물은 끝에 파나우티행 버스에 탑승했다.

 

 

 

라트나 버스파크를 출발한 버스는 Arniko HWY를 따라 박타푸르를 지나 Banepa를 향해 달렸다. 버스파크에서 마이크로버스의 조수들이 계속해서 "바네파!"를 외치며 호객하는 걸로 미루어봐서 바네파가 교통의 요지인 것같았다.  박다푸르를 지나 외곽으로 갈 수록 흰 연기를 뿜고있는 높다란 굴뚝이 이어졌다. 카트만두와 박타푸르에서 볼수 있었던 그 많은 붉은 벽돌집이 여기서 만들어진 벽돌로 세워진것 같았다. 평화로운 시골풍경과는 어룰리지않았고 무엇보다 매쾌한 연기가 재채기를 일으켰다. 나의 관념 속에는 파란 하늘과 시원한 공기, 신령한 설산과 아름다운 전원, 맑은 강과 영적인 삶이 있는 네팔이 있다면, 이곳에 터잡고 살아가는 네팔리의 삶은 차라리 저 삭막한 벽돌공장이 있는 풍경이 더 현실적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중노동과 저임금, 혹독한 노동환경과 아동노동의 현장을 배낭을 메고 스쳐지나가는 여행객의 마음이 아렸다.

 

 

네팔을 여행할 때면 늘 나의 여행이  '가난을 소비하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의식한다. 그래서 네팔리의 입장에서 혹시라도 상처나 모욕이 될수 있는 언행이 아닌지 살피고 씀씀이를 조심한다. 그래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알기에 늘 마음 한켠에 불편함이 있다. 사실 네팔이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쉽게 접근하고 오랜 기간을 주유할 수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궁벽한 네팔리의 삶을 생각하다 뜬금없이 희망이란 무엇일까, 특히 네팔리에게 희망을 무엇을 의미할까 궁금해졌다. 아니 네팔에 희망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일었다. 희망은 지금의 현실을 견디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당기는 힘의 근원이라고 하지만 나는 네팔리에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들었다. 내 자신이 가진 막연한 커피농장의 꿈은 혹독한 네팔의 삶을 목격하면 할수록 엹어져 갔다.  나에게 네팔은 낭만이고 나의 희망을 쉽게 만들어지고 또 쉽게 철회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네팔은 자신들의 삶의 현장이기에 희망을 권하는 것도, 희망 없음을 단정하는 것도 나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냥 삶이 있을뿐!

카트만두에서 Panauti까지는 4km이상의 비포장길을 포함해 30여km의 거리에 불과했다. 잦은 정류소 마다 정차하고는 승객을 내리고 싣다보니 2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정오 무렵에 도착할 수 있었다. 터미날과 시장이 혼재된 거리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파나우티의 Indreshwor Mahadev Temple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작은 박다푸르 같은 느낌의 구역이 나왔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커뮤니티 안내센타가 나왔다. 근무하는 아가씨에게 숙소 소개를 부탁하니 마을에서 운영하는 숙소가 있다며 우리를 안내했다. 사원을 스쳐지나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듯한 좁은 골목끝에 좁다란 3층 건물로 우리를데려갔지만 문이 잠겨 한참을 지체했다. 아랫층에는 주민이 살고 있고 맨 위층 옥탑방만 숙소로 제공되고 있는 것 같았다.  숙소는 불결했고, 부실했다. 혹독한 추위는 아니지만 그래도 새벽이면 서리가 내리는 기온임에도 불구하고 출입문은 유리창이 아니라 그물망만 씌워져있었다. 그래도 사설 호텔보다 마을공동체가 운영하는 숙소에서 하루를 나기로 마음을 먹고 시설에 비해 터무니없는 1600루피의 숙박료를 내고 팜플릿과 책자를 찢어 창을 가렸다.

 

짐을 풀고 숙소를 나섰다. 사원의 부설 박물관에 600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지만 기억에 남을 인상적인 유물은 없었다. 파나우티 사원과 지역의 유래나 역사를 소개하는 안내문을 건성으로 읽고, 박물관을 나와 한적한 사원의 평화를 즐겼다. 사원을 나와 아이들이 뛰어 놀고,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담소를 즐기다가 낯선 이방인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골목길을 지났다. 마을은 크지 않았고 외부 방문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얼마걷지 않아 사원의 끝이자 파나우티를 성지로 만들어준 두 강이 만나는 지점까지 걸어 Bashuki Nag Temple에 멈춰섰다. 카트만두의 파슈파티나트 처럼 화장을 하는 장소에 이르니 이 지역을 신성한 곳으로 여겨 사원을 세우고 마을이 형성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아름다움 속에서 신성함 역시 깃들여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추위와 비둘기 소리에 밤새 뒤척이다 사원의 탑으로 몰려드는 까마귀 떼의 소란에 눈을 떴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서광이 비치는 사원과 먼 산을 바라보며 하루 여정의 행운을 빌었다. 바로 짐을 챙기고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전날 점심을 식당에서 먹고난뒤 연이은 두끼를 전날 아침에 카트만두 부띠끄호텔에서 제공한 토스트 두어장에 컵라면 하나, 그리고 조금의 과자만 가지고 해결했다.  열악한 숙소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커피포트가 있어 컵라면 조리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식당이 있는 곳까지 나갔다 돌아오기도 귀잖았고, 한번씩은 당연한 것을 건너 뛰어도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Panauti를 떠나 나모붓다로 향하는 길은 가슴 부풀었다. 오늘은 어떤 우연과 그로인한 난관과 희열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을까 두근 거리는 가슴을 안고 숙소를 나섰다. 이른 아침 햇살에 대지를 덮은 서리가 수증기로 피어오르는 시골길을 따라 maps.me가 가리키는 7.8km의 길을 걸었다. 등교를 하는 학생과 출근하는 직장인, 그리고 일터로 나가는 농부와 소까지 마주치기도하고 나란히 걷기도 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면서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간혹 지나가는 차들이 일으키는 먼지가 우리를 괴롭혔지만 전반적으로 거리는 쾌적했고 전원은 아름다웠다. 오렌지 농장을 지날 때면 녹색농원에 점점히 박힌 주항색 빛깔의 조화에 눈을 뗄수가 없었고, 관광지가 아니라 네팔 농촌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길이라 더욱 좋았다.  조형적인 이랑을 만들고 무엇인가를 심고 있는 밭 풍경을 만나 살펴보니 감자를 심고 있었다. 우리 처럼 직선의 이랑이 아니라 미로같은 이랑을 만들고 감자를 심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묻지 못했다. 전날 버스를 타고 지나며 보았던 벽돌공장들을 걷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날 수 있었다. 주변과 부조화를 이루며 돌출적으로 솟아있고 굴뚝과 검은 연기, 그리고 흙더미  사이를 오가며 인부들은 벽돌을 나르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 냄새를 피해 종종 걸음으로 공장 지역을 벗어났다.  

 

 

 

지도가 가리키는 거리보다 훤씬 더 걷고 휠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린 뒤에 나모붓다에 도착했다. 숙소와 가게들로 이루어진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 절의 초입 광장에 이르렀다. 광장은 불탑이 있는 마당 한쪽을 제외하곤 식당들이 빙둘러 자리하고 있었고 우리는 햇살 좋은 가게에 들어가 이른 점심을 해결했다. 불탑을 도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한무리의 백인 여성들로 이루어진 승려들이 불탑앞에서 예배를 올렸다. 우리도 불탑을 한바퀴 돌고 오색 타르초가 휘날리는 계단을 올라 나모붓다사원의 본전에 도착했다. 조망 좋은 산능선을 따라 형성된 사원은 세월의 흔적은 많지 않았지만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멀리 히말라야 설산까지 이어지는 광할한 대지를 배경으로 좁은 터에 아기자개하게 배치된 사찰의 건축물이 인상적이었다. 안내문을 보니 오래전 왕국의 자비롭고 현명한 왕자 마하사티가 우연히 굶주린 호랑이를 만났는데 자신의 몸을 보시하고 부처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고 이를 기리기 위해 지어진 사원이라고 했다.

 

 

시원한 조망을 가진 아름다운 사찰에서 스케치하는 아내 덕에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 올라갔던 그 계단을 통해 나모붓다사원을 나와 둘리켈로 가는 버스를 찾았다.  의사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정확한 정류소 위치와 버스 도착시간을 알수가 없어 그냥 하염없이 둘리켈 쪽으로 방향으로 잡아 걷기로 했다. 내리막길을 30분 정도 걸어 첫마을이 나왔을 때 우리가 방향을 잘못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왔던 길을 되돌아 확인된 버스 정류장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버스를 기다렸다. 화물차가 지나가자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네팔리들은 화물차에 올라타고 사라져갔다. 그렇게 몇번을 반복해서 우리 부부만 남는 상황이 게속되자 불안감이 몰려왔다. 혹시 이러다가 해라도 떨어지면 마땅한 숙소를 찾을 수도 없는 산중턱마을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마냥 둘리켈행 버스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일단은 최대한 걷기로 마음을 먹고 또 다시 낯선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30분을 채 걷지 않아서 승용차 한대가 다가오더니 우리의 목적지를 물었다. 우리의 목적지와는 조금 어긋나지만 같이 갈수 있는데 까지 태워주겠다는 차에 염치 불구하고 올라탔다. 승용차에는 네팔청년과 네덜란드여성이 타고 있었고 둘은 인근 트리뷰반 대학교와 관련있는 사람들로 보였다. 간단한 인사를 건넨뒤 졸음이 오기 시작할 무렵 차는 둘리켈로 들어섰고 삼거리 버스파크에서 우리는 내리고 승용차는 왼쪽으로 틀어 트리뷰반대학쪽으로 떠나갔다. 고마운 마음을 대신해 아내는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 한장은 찢어 선물했다.

 

다행히 승용차를 얻어타는 바람에 쉽게 둘리켈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 도시에 대해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무엇을 할 것인지 구체적 계획도 없어 막상 도착하고나니 난감했다. 우선 호텔을 찾기로 했다. 터미날 근처다 보니 여러개의 호텔이 산재해 있어 손쉽게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여행객의 행색을 보고 건달같은 호객꾼이 우리를 따라붙었다. 호텔을 들어서면 한발 먼저 카운터에 달려가 우리를 자신이 데리고 온 손님으로 소개하고 호텔비를 흥정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러번 이야기하고 뿌리쳤지만 우리의 대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우리를 따라왔다. 날을 곧 질것 같은데 호텔을 정하지 못하고 건달까지 따라 붙은 상황이 불안감을 일으켰다. 어렵게 택시를 타고 여행안내서에 소개된 호텔로 가자고 했지만 기사는 우리가 요구하는 호텔의 위치를 몰랐다. 결국 택시 기사는 그 건달한테 핸드폰까지 빌려쓰며 길을 물어보는 상황이 되고, 외딴 산길을 불안하게 헤매던 끝에 어두워지기 직전 '파노라마롯지'라는 호텔에 도착했다. 예상 택시비의 두배를 물고 들어선 호텔은 지난 지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부분적인 공사가 진행중이었고 손님은 우리가 유일했다. 롯지의 주인은 친절했고 우리가 요구하는데로 어두운 전등을 갈아주고 전기 스토브까지 내어주었고 음식과 이부자리는 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낮시간의 불안감이 이어지면서 깊은 잠을 청하지 못하고 새벽을 맞았다.

 

 

북쪽과 동쪽으로 창이 나 있어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멀리 히말랴야 설산이 시야에 잡히고 침대에 앉아 정면 동쪽으로 바라보면 일출을 볼수 있는 전망 좋은 방에서 침대위 이불속에서 꿈같은 일출을 맞았다.  떠오르는 해가 온 세상을 비추자 지난날 오후부터 밤새 나를 사로 잡았던 불안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언제  왜 인지도 모를 막연한 불안감이 물러가자 방안 가득 환희가 넘쳤다. 내가 묵고 있는 이 호텔의 이 공간이 세상에서 제일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다가왔다. 기쁜 마음으로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와 산책을 나섰다. 산책길은 따뜻했고, 아름다웠고 조금은 신비롭고 한산한 산길이었는데, 간혹 경비원이 경비를 서고 있어 정부 시설이 접해있는지 의아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The Dwarika's Resort"라는 고급 리조트의 외곽 산책길이었다. 내가 묵은 롯지보다 10배가 훨씬 넘는 숙박비를 내야하는 The Dwarika's Resort의  산책길을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한 셈이었다.

 

 

산책끝에 panorama view lodge에 하루를 더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인근의 네팔 청년들의 데이트 장소로 보이던 Devisthan이라는 뷰포인트에 올라 시간을 보내고 호텔로 돌아와 책을 읽고 일지를 적고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파노라마롯지에서의 꿈같은 이틀을 보냈다. 기록할 것이 없어 더 좋았던 이틀의 시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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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13일 포카라를 떠나 카트만두에 도착, 14일 타멜과 박타푸르를 주유하다 15일 일행들은 모두 한국으로 출국하고 우리 부부만 덩그러니 남아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다.

네팔 최고급 버스라는 자가담바를 타고 포카라 카투만두간 트리뷰반 하이웨이를 하루종일 달렸다. 예상 시간 7시간이라고 하지만 예상은 그냥 예상일 뿐이었다. 버스가 겨우 카트만두로 들어서는 마지막 고갯길을 넘어설 무렵 출발한지 9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긴 시간이지만 버스는 아늑했고 길은 편안했다. 일반 마이크로버스 같은 난폭운전도 없었고 스튜어디스의 서비스도 지루함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푹신한 좌석에 깊게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지난밤 꾸었던 지독한 꿈을 회상했다.

늘 반복되는 꿈이지만 세월이 가도 공포는 줄지 않았다. 나의 악몽은 늘 30살 전후에 멈춰. 대학원생의 신분이지만 학문을 계속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삶의 전망도 없고, 결혼은 하고 아이까지 있는 상황에서 먹고살 방도도 없는데 목을 죄는 수업의 하중은 날로 더해가는그때로 나는 다시 돌아간다.  꿈 속에서는 늘 나는 나를 확신하지 못한다. 과외를 할려고하지만 내가 가르칠수 있을까 영어는 원래 못하고 수학은 다 잊어버렸는데 어떻게하지 가슴졸인다 이어진 꿈에서 리포터를 제출해야하는데, 졸업논문을 작성해야하는데, 공부를 해야하는데 마냥 식은 땀을 흘리며 쫒기게 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과사무실엘 갔는데 갑자기 내가 학생인지 확신이 들지 않고 졸업식장을 갔는데 내가 졸업생이 맞는지 학점은 다 땄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 당황하며 잠을 깼다. 늘 반복된 꿈이지만 사랑곳까지 와서 같은 꿈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며 선잠을 깨고나니 기분이 착잡했다. 힘들었던 그 시기를 지나온지 25년이 넘었는데 나의 무의식은 아직 그 시절에 사로 잡혀 있는걸까 알 수 없었다.

버스가 카트만두로 들어서는 검문소를 지나자 시커면 흙먼지가 거리를 휩쓸고 버스를 덮쳤다. 창틈으로 스민 먼지에 이내 목은 칼칼해지고 뿌연 흙먼지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도로는 온통 공사 중이었고, 비가 내린 기억조차 없는 건기다 보니 한순간 앞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치 두터운 먼지가 거리를 덮고 있는데다 심각한 교통체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트만두에 들어선지 한시간이 훨씬 넘어 종점인 안나푸르나 호텔 마당에 도착했다. 카트만두 뷰띠끄호텔에 메일로 픽업을 부탁해놓은 택시와 룸보이 빔센이 우리를 맞았다. 교통체증으로 정확히 예정시간 3시간을 넘겨 우리가 도착했는데 기사는 그 3시간 동안 우리를 기다렸다고 했다. 불평이라기보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실을 단지 알리는 표정이 더 당혹스러웠다. 혹시 우리만 손님으로 받아도 오후 벌이로 충분하다고 받아들이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어떤 경우도쫒기지 않는 것 같은 시간에 여유롭고 관대한 네팔인의 품성이 부러웠다.  모처럼 숙소 인근의 마은틴스테이크하우스에서 저녁을 먹고 아까운 저녁시간을 잠으로 채웠다.

일행의 출국을 앞두고 온전히 남은 카트만두의 마지막 하루를 시작하면서 정확히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계획하지 못했다. 호텔을 나와 타멜 거리거리를 걷고 쇼핑도 하고 그리고도 시간이 남아 논의 끝에 박타푸르를 향했다. 일행들은 이미 여행 초기에 파수파티나트와 보드낫을 다녀왔기 때문에 남은 반나절을 값지게 보내기에 박타푸르만한 곳이 없었다. 라트나 버스파크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박타푸르에 도착했다. 박타푸르는 지난 2015년 4월 25일 대지진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는데 그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일부 건물은 흔적없이 무너져 내렸고, 골목몰목의 건물들 조차 긴 막대와 대나무로 아슬아슬하게 받쳐져있는 경우가 많았다. 불안해서 어떻게 저기에 살까 걱정되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위험을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같았다.

박타푸르는 카트만두와 파탄과 더불어 카트만두벨리의 3대왕국의 하나로 17세기 후반 조성된 왕국이라고했다. 순례자의 도시를 의미하며 BHADGAON이라고도 불리는 박타푸르는 다른 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되어 온전히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듀바르 광장을 지나 지명도 모르고 어디로 이어지는 지도 모르는 골목길을 헤메기 시작했다. 도자기가마터도 지나고 여러가지 야채를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는 골목도 지나 눈에 익은 Nyatapola 탑에 이르렀다. 그 자체가 하나의 사원이고 그앞쪽 마당에 같은 이름의 카페에서 5년전 차를 마시던 기억이 새로웠다.

광장과 사원으로 어우러진 구역을 서쪽으로 나와 인공호수 근처에 이르자 많은 인파들의 북적되고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와 풍경을 쫒아 학교 운동장 같은 곳을 드러서니 수십명의 아이들이 가사를 입고 무슨 예식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 가사를 입은 아이들이 승려가 되는 예식을 올리는 그런 자리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행사는 그리 엄숙해 보이지 않았고 조금은 분주하고 소란스러웠다. 10여명으로 구성된 팀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의상이 달라 꼭 부족을 달리하는 것같이 보이는 다른 팀이 이어서 노래를 불렀다. 한쪽에 늘어놓은 게시판 같은 것에는 기부금으로 보이는 목록을 적어놓기도 했고 마당 한켠에는 손수건 모양의 여러색갈의 천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참가자들끼리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휘둥그래한 눈으로 인파들 사이를 헤메다 카트만두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파크를 찾았다. 박타푸르를 떠나려는 우리 눈앞에 갑자기 전통밴드가 지나가고 신상을 앞세운 행진이 이어졌다. 타악기 중심의 거친주는 애조와 더불어 신령한 서정을 선물했다.  가락과 풍광에 매혹되어 행렬의 끝이 사라질 때까지 넋을놓았다.

 

 

 

카트만두로 돌아오니 라트나 버스파크에서 타멜로 이어지는 거리의 공터에는 수천명의 궁중이 모여 있고 길은 인파로 넘쳐났다. 무슨 정치 집회인지 축제인지를 끝내 물어보지도 못한 채 우리는 군중들의 파도에 휩쓸려 가까스레 타멜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카트만두 광장 인근에서 와이프를 잊어버렸다. 입장료를 10불이나 내야되는 구역인데 와이프는 현지주민같은 자연스런 걸음으로 무사통과를 해 버렸고 우리 일행은 쫒아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하는 상황이 되어 그냥 연락을 시도해서 다른 곳에서 만나는게 낮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일행들이 선물을 사러 돌아다니는 사이 나는 와이파이가 되는 까페에 들어가 와이프랑 연결을 시도했다.  연결은 되다가 말다가 불완전했지만 겨우겨우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행들은 먼저 네와르 음식 전문점이면서 문화공연도 하는 유명하다는 Nepali Chulo로 향했다. 일행들에겐 오늘이 네팔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보니 특별한 이벤트가 필요했다. Nepali Chulo는 여러군데 묻고 정보를 얻어 가장 고급스런 네팔전통식당으로 알고 선택했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의 가슴을 졸인 끝에 와이프는 릭샤를 타고 도착했고 공연과 식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네팔물가를 고려할 때 엄청나게 비싼 식사임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평범했고, 음식은 기대 이하였다. 나름대로 고급스런 식당건물이 음식값을 부풀려놓은 것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았지만 네팔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조금은 억울하게 끝이 났다.

 

 

15일 친구들은 트리뷰반 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우리부부는 왠지 모를 허기를 느꼈다. 당장 내일부터 우리 부부 단독의 여정을 이어갈 예정이라 조금은 홀가분하고 들떠야할 것 같아지만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기분전환을 위해 호텔을 나섰고 네팔민속박물관을 찾아 나라얀히티왕궁앞의 더바마그 거리를 걸었다. 지도에는 나와있는 민속박물관은  찾지 못하고 인근에서 옥류관이라는 북한식당을 우연히 맞딱뜨렸다. 반가운 마음에 식당을 들어섰는데 우리를 맞는 여성 종업원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주관적인 느낌일까 의아했지만 최대한 편하게 마음을 먹고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에 대해서는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식당의 분위기는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것 같았다. 왠지 모를 서먹함과 낯설음이 현지 네팔리 식당보다 더한 느낌이 들었다. 찾지 못한 민속박물관의 위치를 물어보니 네팔산지가 3년이 된다는 종업원은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무엇인가 물어볼까봐 미리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 가슴아팠다. 정치 체제의 차이가 같은 한족사이에서도 이리 정서적 벽을 세울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난 보름을 같이 했던 일행들이 떠난 타멜거리를 걸으며 저녁을 맞았다.  5명의 일행이 떠나간 타멜은 갑자기 텅 비어보였다. 나에게는 네팔 여정을 같이 하기 전의 친구는 네팔 여행을 같이한 뒤의 친구와 같은 사람일 수 없었다.  나는 그들과 평생 네팔의 추억을 나누고 의지하며 살아갈 사람으로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게 된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뻐야했고, 마음 따뜻해야했다. 그런데 쓸쓸함이 밀려오고 걸음은 허전해졌다. 조금은 고급스런 저녁으로 스스로를 위무하고 일찍 들어온 호텔에서 남은 한달 반의 여정을 계획하며 얉은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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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1일 사랑곳에서 두명의 남자는 짚차를 타고 나머지는 패러글라이드를 타고 일주일만에 포카라로 돌아왔다. 도착한 첫날 오후 재래시장과 가이드 라마가 다녔던 트리뷰반대학 포카라캠퍼스를 둘러보고, 12일 까훈마을을 찾아 기부행사를 하고 데비폭포, 마하데브동굴, 그리고 타쉬링 티벳탄 난민촌을 방문하고, 13일 카트만두로 복귀했다. 

사랑곳의 아침은 황홀했다. 롯지옆 계단을 따라 어둠을 가르는 움직임이 소란해지자 우리도 마음이 급해졌다. 가이드 라마의 재촉에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너나할 것없이 방을 나섰다. 단체 여행을 온 학생들 무리와 관광객들이 섞인 행열을 따라 500여m를 올라가자 Sarankot View Tower가 나왔다. 도착하자마자 어둠속에서 두런두런 들리는 목소리가 탄성으로 바뀌고 멀리 동녘이 밝아왔다. 한평생을 살면서 한번도 보지 못한 일출을 네팔에 온지 열흘만에 4번째  마주했다. 푼힐에서 맞은 첫 일출과는 달리 여전한 울릉거림 한켠에 아쉬움이 일었다. 레이크사이드에선들 마차푸차례가 보이질 않을리 없을뿐아니라 아직 한달반의 네팔여정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사랑곳에서 마주 보는 마차푸차례를 향해서 작별인사라도 올려야할 것 같았다.

이날은 세계3대 패러글라이딩 명소라는 사랑곳을 찾은 김에 패러글라이드를 타기로 되어있었다. 라마의 제안을 하늘을 마음껏 날아보고 싶었다는 김셈이 받았기때문이다. 6명의 일행중 나는 송선생과 함께 패러글라이드를 포기했다. 사실 고소공포를 이길 만치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준비된 차에 오르니 금새 Sarangkot Paragliding Take off Point에 도착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기도했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시간도 아니어서 인지 아직은 한산했다. 주변을 둘러보고 멀리 포카라 전경을 바라보며 한참을 시간을 보낸뒤 파일럿이 도착하고 우리팀은 활공을 준비했다. 하늘을 날면서 페와호수와 포카라를, 그리고 멀리 안나푸르나 산군을 내려다보는 경험이 얼마나짜릿할지하는 기대에 활동을포기한 나조차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내 준비가끝나고 첫주자로 와이프가 날아올랐다. 잠시 달리다 땅에서 발이 떨어진뒤 계곡으로 처박히는듯 위태롭게 가라앉다가 갑자기 상승기류를 만난듯 하늘을 치고 올라갔다.  하늘을 빙글빙글 돌던 글라이드는 까마득한 높이로 올라가 하나의 점이 되었고, 이내 우리 일행과 다른 체험객까지 하나둘 활공을 시작하니 하늘은 새떼들이 몰려나는듯 멋진 장관이 연출되었다.

일행모두가 활공을 하고 송선생과 나는 라마와 함께 찦을 타고 포카라로 향했다. 호텔 Karuna에 도착하고 얼마되지 않아 패러글라이드로 포카라에 도착한 일행들이 무사히 착지를 하고 호텔로 들어섰다. 모두들 들떤 기분에 간단히 짐을 풀고 포카라의 여행자들의 거리인 레이크사이드로 몰려나갔다. 산에 들어간지 일주일 남짓 밖에 되지 않았지만 모두들 다시만난 도시가 반가웠다. 오랜만에 고급 레스토랑에서 생선요리를 먹고 세탁소에 빨래를 맡기고 라마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리고 레이크사이드의 자유를 만끽하며 활보하고 라마의 안내로 재래시장을 거쳐 트리뷰반대학 포카라 캠퍼스를 둘러보고, 다시 포카라의 옛거리를 거쳐 레이크 사이드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한국식당에서 지난 여정을 같이한 가이드와 포터에게 한식을 대접하고 우리의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라마와 함께 포카라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Kahun마을로 향했다. 조그마한 기부행사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012년 첫 네팔여행 때 마주쳤던 길거리의 아이들과 트레킹 코스에 만난 가난한 아이들이 늘 눈에 밟혔고 여행내내 마음을 불편하게도 했다. 조금이라도 자책을 덜고자 이번 여행에서는 작은 기부를 하기로 했다. 여행을 같이 하는 동행 들이 십시일반하고 친구들이 여행경비에 보태라며 전해준 금액까지 합쳐 많지 않은 돈이지만 에이전시에 기부 방법을 물었고 작은 학교에 학용품을 기부하기로 약속했었다. '행사'를 원치 않았지만 가이드 라마는 자신이 속한 로타리 클럽을 통해 대대적인행사로 기획을해놓은상태였다. 참 곤혹스럽고 부담스런 자리지만 마지못해 참여를 결정했다.

 

시내를 벗어나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한참을 빙빙돌라 도착한  Kahun Community Primary School은 전교생 61명에 수명의 교사, 그리고 작은 규모의  초라한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낡은 건물은 여기저기 보수가 필요했고, 가구며 기자재는 초라하기 이를데 없었다. 고작 문구류와 책가방 몇십개 가지고 와서 도움을 준다는 것이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로타리클럽과 학교측에서는 너무 성대한 준비로 우리를 맞았다. 방학중임에도 불구하고 전교생과 학부모가 등교를 하고 지역 유지라는 분들이 행사를 이끌었다. 라마의 통역에 힘입어 한국어로 인사말을 전하고 기념 사진을 찍었지만 끝내 부끄러운 마음은 가쉬지 않았다. 기부를 통한 기쁨보다는 많이 돕지못한 아쉬움이 더 컸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덜컥 한가지 약속을 해 버렸다. 어린 여학생 한명이 얼굴에 여러갈래로 찟어져 꿔맨 흉터가 남아있었고 사연을 들어보니 어릴 때 호랑이에게 물린 상처라고 했다. 얼떨결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이 아이를 한국에 초대해 상처를 치료할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겠다고 말해버렸다.

기부행사를 마치고 레이크사이드로 돌아온 우리는 촘롱에서 상행길을 택해 혼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다녀온 A선생을 맞이했다. 서로에 대한 실망과 서운함이 남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은채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포옹하며 화해했다. 지독한 감기에 몸살까지 걸려 힘겨워하는 A선생을 호텔에 남겨두고 나머지 일행은 모두 오후 내내 데비폭포, 마하데브 동굴, 타쉬링 티벳탄 난민촌 등을 버스와 도보로 돌아다니며 포카라에서 보내는 마지막 하루를 즐겼다. 데비폭포까지 간선길을 걸을 때 나는 문득 우리가 포카라의 이방인이 아니라 어쩌면 오래전부터 살아왔고 포카라의 골목 골목에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주민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길과 집, 친절하고 익숙한 표정을 가진 사람과 놓아 먹이는 순한 강아지들, 그리고 거리에 날리는 쓰레기들까지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보냈던 지난 시절의 완벽한 기억을 현실에 재생해 놓은 듯한 착각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늦은 오후 페와호수로 돌아와 부메랑 레스토랑에서 벤치에 누워 얇은 오수를 즐기며 차를 마셨다. 인생에 다시 없을 호사를 누리며 포카라에서 보내는 남은 시간을 아쉬워했다.  

https://www.rotaractnepal.org/project/detail?id=1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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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9일 란드룩을 출발하여  담푸스에서 걸음을 멈추고, 1월10일 안나푸르나를 벗어나 멀리 포카라가 내려다보이는 사랑곳에서 짐을 풀었다.

란드룩에서 보낸 반나절은 참 값졌다. 걸음을 시작한뒤 첫 휴식이었고 전체 여정의 절반이 지나는 시점에서 한 호흡을 쉬며 남은 여정을 준비하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예정되었던 일행과의 작별에 이어 작은 분란뒤에 예정에 없던 작별마저 있은 뒤라 분위기 쇄신차원에서라도 뭔가 마디가 필요하기도 했다. 지누단다에서 란드룩까지 이르는 길은 모디콜라 계곡을 따라 이어졌다. 뉴브릿지마을을 만나 모디콜라를 건너고 다시 계곡을 따라 걸으며 서서히 오르막을 올라 강건너 간드룩이  마주보이는 높이에 이르러 자리잡은 마을이었다. 같은 고도의 마을이지만 상행길에 만난 간드룩은 산마을이자 트레커들을 위한 마을같은 느낌이었다면 하행길에 만난 란드룩은 그냥 산록 농촌마을로 다가왔다. 안나푸르나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농촌마을에서 하루를 쉬고 본격적으로 하행길로 접어드는날 우리는뒤돌아 안나푸르나를 바라다보고 등을 돌려 안나푸르나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찍었다.

란드룩 이후의 길은 편안했다. 완만했지만 그래도 내리막길을 따라 안나푸르나를 등지고 걷고 또 걸었다. 하산한다기 보다는 수평의 길을 걷는 느낌은 담푸스까지 이어졌다. 상승하는 삶은 이미 지나갔고 그리고 하강하기엔 뭔가 억울하지만 그래도 이제 수평적인 삶마저 끝나간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되는 우리는 우리 삶을 닮은 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가 걷는 한걸음 한걸음마다 안나푸르나는 멀어져가고 그만치 고도가 줄었다. 고도가 즐어드는 만치 초록빛은 늘어가고 우리는 네팔리 농부들이 가꾸어 놓은 이쁜 밭두렁길은 걸었다. 늘 논밭은 아름답고 그 아름다운 논밭을 가꾸어 놓은 농부의 삶은 고달프다. 농부로 사는 내가 한국에서 그렇듯 네팔의 농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농부는 수도자이고 농사는 수행인지도 모른다. 금전적 보상이 충분이 주어지지 않지만 피땀을 흘려가며 뭍생명의 먹을 거리를 만들고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니 세상의 모든 농부가 성자가 아니면 누가 성자일 수 있겠는가. 나는 자격있는 트레커로 네팔리 농부가 가꾸어 놓은 아름다운 밭두렁길을 기쁜 마음으로 걸었다.   

두달일정의 이번 여정에서 친구들과의 첫 트래킹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우리는 안나푸르나품을 떠나 포카라로 되돌아간다. 영원히 잊지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될 일행과의 여정이 하루하루 줄어들자 나의 뇌리에는 지금 이 순간을 지속시킬 묘안이 떠올랐다. 가이드 라마를 통해 얻어들은 정보지만 네팔 산골에 조그마한 학교 하나를 짓는데 3천만원이면 되고, 교사 월급이 1인당 10만원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만약 도반들이 작당하고, 뜻을 같이하는 분들을 모아 힘을 합친다면 네팔에 작고 초라할 망정 학교 하나 정도를 운영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학교를 중심으로 친구들이 인연을 엮고 그 학교에서 남은 삶을 살아도 되겠다는 막연한 기대도 생겨났다. 한 평생을 살면서 일정기간 자신의 삶의 한부분이라도 누군가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없는 삶이 될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좋은 인연들과 작당하는 재미까지 있으니 더더욱 기쁜 일일 것이다. 현실화하기에는 더 많이 고려해야할 것들이 있겠지만 일단은 내 마음속에 수많은 꿈들중의 하나로 소중히 모셔두기로 했다.

담푸스는 아늑했다. 골목길 가득 친구들의 고함소리가 번지고, 옆집 누렁이 짓는 소리에 엄마가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까지 들릴것 같이 유년의 한때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히 아름답고 아늑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저녁 무렵 수학여행을 온듯한 수십명의 학생들이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편하고 조용한 잠자리가 되었을터인데 밤새 학생들의 조잘거림과 동네 가득 울리는 개짓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밤의 소란은 아침 해와 함께 사라졌지만 어쩌면 산을 나와 도시가 가까워지는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삶의 생기였느지도 모르겠다.

잠을설친 새벽일찍 롯지를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던 전망대를 올랐다. 아직 공사가 덜된 전망대를 오르자 지나온 안나푸르나 산군이 한눈에 들어왔다. 담푸스전망대에서 바라다 보는 안나푸르나는 푼힐에서 보던 풍경과는 또다른 멋을 보였다. 푼힐에서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가까이 느껴졌던 산과 달리  산에서는 한발짝 멀어졌지만 마을 넘어로 보이는 산은 보다 현실적이었다. 아쉬움을 달래고 돌아온 롯지는 정적이 흘렀다.  밤새 떠들던  학생들은 잠을 자는지 벌써 길을 떠났는지  알 수없었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롯지를 나왔다. 담푸스를 벗어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잠시 오르막길이더니 금새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한시간여만에 포카라-바글룽 하이웨이를 만났다. 

걸으러 왔다는 사람이 차 못탄지 몇일이나 되었다고 차를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대기하고있던 마이크로버스에 오르자 차는 바글룽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는 더 오래 타고 싶은 내 마음을 아랑곳없이 이내 사랑곳 입구에 도착했고, 우리를 내려주고는 제 갈 길을 떠나갔다. 노점에서 밀감과 포도를 사들고 라마가 가리키는 길을 접어드니 우리를 맞는 길은 한창 공사중인 찻길로 흙먼지가 앞을 가렸다. 차라도 한대 지나칠 때면 숨을 쉬기 조차 힘들만치 먼지가 날리는 도로를 따라 사랑곳으로 향했다. 포카라를 떠나 트레킹을 시작한 뒤 최악의 길을 만나 힘든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도시와 산의 중간쯤에 있는 네팔리의 삶속을 걷는 경험은 즐거웠다.

 

Lake View Lodge Sarangkot에 짐을 풀고 멀리 내려다 보이는 페와호수와 포카라의 풍경을 만끽하며 네팔여정의 첫 트레킹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제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할 우리 부부와는 달리 곧 여정을 접고 귀국해야하는 친구들은 아쉬움이 많은 것 같았다. 산을 통해 느낀 몸과 다스린 마음은 비로소 도시를 만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가 이번 트레킹을 어떻게 느끼고 정리해서 기억의 한켠을 채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번 트레킹을 통해 모두의 얼굴은 더 밝아지고 목소리의 생기가 더 높아졌다. 옥상에 빨래를 걸어 바람을 맞히니 우리는 롱다가 된 빨래와함께 포카라와 페와호수, 그리고 사랑곳의 전망좋은 롯지를 더욱 풍요롭게하는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어둠이 롯지를 삼키니 멀리 포카라의 야경이 선명히 살아났다. 이제 우리는 안나푸르나의 대자연을 떠나 도시가 가까워졌음을  느껴야했다. 아랫배가 살짝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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