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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네팔 들어온지 한달이 지났고 새로운 한달을 안나푸르나 라운드로 시작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전 하루의 여유를 카트만두 여러 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보냈다. 28일 버스로 베시사하르까지 가서 바로 걷기를 시작하여 불불레 지나 라디바자르에서 라운드 첫 밤을 지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건기에 내리는 비는 축복이라고 했다. 대기의 먼지가 씻기고 마야거르츄의 마당은 촉촉히 젖어들었다.  우리가 걸을 길들 역시 먼지가 가라앉고 적당히 젖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일이면 우리 부부는 M과 D와 함께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고  미리 와있던 L은 귀국길에 오르니 모두가 같이 하는 이날 하루가 더없이 소중했다. 일행이 늘어 택시 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다보니 2대를 부탁했다. 파슈파티나트로 향했다. 



카트만두를 찾는 방문자들이 꼭 들러야 하는 곳 중의 하나가 Pashupatinath다. 파슈파티나트는 네팔에서 가장 유명한 힌두교 사원으로  멀리 인도서까지  순례자들이 찾아 오는 곳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노천 화장의식을 하는 하는 곳으로 더 알려져 있다. 사원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화장장인 아라 갓(aarya ghat)은 파괴의 신인 시바신의 화신인 파슈파티(야수의 왕)에게 받쳐진 사원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핵심적인 사원내부만 비힌두교도에게 입장을 금지하고 있지만 거의 날것 그대로의 흰두 예식과 화장 의식을 접할수 있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중의 하나다.

 

 

택시에서 내려 일행을 찾는 동안 가는 비가 보도를 적시고 있었다. 비둘기떼의 어지러운 날개짓과 비가 만나니 파슈파니나트의 풍경이 더 스산해졌다. 1인당 천루피의 입장료를 내고 사람들의 흐름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몇걸음 걷지 않아 갑자기 군인들이 다가와 나의 걸음을 막아섰다. 아무 생각없이 힌두교도만 들어갈 수 있는 사원 입구로 향하다 군인으로부터 제지를 받은 것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방향을 바꾸어 허용된 구역 안으로 들어서니 말라가는 바그마티강과 강변의 화장터가 눈에 들어왔다. 오직 하나의 화장터에서만 마지막 불꽃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사연을 간직한 삶이 지상에서 그 삶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한명의 삶이 가졌을 모든 순간들의 희열과 고통, 그리고 그의 마음을 채웠을 그리움과 공허가 물밀듯 다가왔다.  그리고 죽음을 바라다 보는 산사람들의 마음에 피어오를 만가닥 상념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바그마티 강을 건너  시바신에게 받쳐졌다는 Pandra Shivalaya라는 탑들 사이를 걷고, 강가의 둥근 반석위에서  의식을 치루고 있는 사람들의 처진 어깨를 바라다 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동산의 정상에 올랐다. 동산을 이루고 있는 므르가스탈리 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한치의 틈도 없이 사원과 탑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고, 탑들마다 시바신이 타기를 기다리는 Nandi의 궁둥이가 우리를 반겼다. 비맞은 원숭이가 추운듯 서로 엉켜 웅크렸지만 낯선 방문객을 마득잖은 눈으로 바라단 볼 때는 주인의 위엄이 느껴졌다. 하지만 비에 젖은 Prasad(신전에 받치는 음식)를 주워먹을 때의 눈빛은 혹시나 낯선 인간들에게 나의 몫을 뺏기지난 않을까는 초조함과 비루함을 담고 있었다.  삶은 존엄과 비천 사이에 두루 걸쳐 있는 것! 그점은 모든 생명에게도 해당할 것이기에 우리는 늘 겸손해야하는 지도 모르겠다.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동산을 내려오니 시바의 아내 Parvati의 자궁이 묻힌 자리에 세워진  Shree Guhyeshwori Temple이 있었다.  이 사원은 불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임신을 축원하는 유명한 사원이라고 했는데 지난 지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원을 지나 바그마티 강을 건너니 한적한  주택가가 이어졌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6명의 일행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고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대로를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든뒤 혹시라도 길이 어긋날까 일행을 기다렸는데 결국 와이프가 보이질 않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다른 길을 택해 달려가 보았지만 하늘로 솟아는지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보드낫이라는 목적지를 공유하고 있으니 택시를 타도 되고 물어서 걸어 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남은 일행 5명은 보드낫으로 향했다.


 

보드낫은  여전했다. 입구는 인파가 붐비고 앞길은 차들이 엉켜 복잡했다. 티벳 불교의 성지 답게 각지 에서 모여든 티벳탄 순례자들과 우리같은 방문자들로 북적였다. 옛날 한때는 티벳 라사와 카트만두를 오가는 무역상이 머룰던 타망족의 마을이었던 이 구역 일대는 이제 티벳이 중국에 복속된 뒤 망명한 피벳탄의 집단거주질 바뀌었다고 했다. 보드낫 안으로 들어서자 스튜파를 도는 티벳탄들의 무리를 따라 나도 모르게 휩쓸리며 내가 가진 세상에 대한 기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순례객이 스튜파를 도는 의식을 kora라고 하는데 언젠가 다큐에서 몸을 겨우 가누는 할머니가 오체 투지를 하며 kora를 하는 이유를 묻자 뭍 생명의 고통을 들기위해서라고 하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나도 내 자식의 성공이 아니라, 나의 부귀와 영화가 아니라 세상의 생명 가진 모든 존재의 안녕을 빌며 스튜파를 두어바퀴 돌았다. 그리고 스튜파를 감싸고 있는 건물의 전망좋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고 어렵게 와이파이를 연결해 길일흔 와이프와 접촉했다.

 


일찍 숙소롤 돌아와 내일이면 떠날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위해 짐을 쌌다. 빠진 것은 없는지, 빼도 될 짐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고 20여일동안 입에 맞는 음식을 접하지 못할 것에 대비해 저녁을 삼겹살로 준비했다. 벌써 익숙해진 가까운 골목길 구멍가게에서 식재료를 사서 밥을 하고 고기를 구웠다.  마야거르츄의 팟샹은 어떻게 구했는지 냉동 삼겹살을 조달해 주었고 다른 일행과도 같이 음식을 나누고도 고기가 남았다.  모처럼 속이 편안했고, 마음 편히 식사를 하고 나니 라운드 내내 계속 속이 안좋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사라졌다. 역시 나는 산 체질이라 산을 가기 전날부터 몸이 살아난다고 너스레를 떨며 침실로 돌아왔다.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떠나는 날 아침이 밝었다. 지난 일주일 같이 했던 L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남은 4명은 같이 안나푸르나로 떠나는 날  마야거르추의 아침은 일찍 시작됐다. 6시 30분 L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앞으로 20여일의 여정을 같이할 2명의 포터 라마나쉬와 Basu 그리고 4명의 트레커가 2대의 택시를 타고 겅거부 뉴버스파크로  향했다. 도착한 겅거부는 5년전의 남루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언제 들어섰는지 번듯한 건물과 넓은 버스 승강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출발한 버스는 역시 시원하게 뚤린 RING ROAD를 따라 칸트만두를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길은 달라졌지만 수시로 서고 가기를 반복하면서 문을 연채로 위태롭게 매달린 조수가 호객을 하는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버스는 거의 1시간 반 만에 카트만두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포카라를 가는 프리씨비 하이웨이를 둠레까지 달려 둠레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은 버스의 시야에 설산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슴뛰는 설산의 풍경을 배경으로 그 아래 산중턱에 터잡아 살아가는 삶이 도드라지게 다가왔다. 오후 1시 30분이 넘어 안나푸르나가 시작하는 마을 베시사하르에 도착했다. 오래전 유일한 출발지 였던 베시사하르는 불불레까지 길이 나면서 트레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고, 다시 참체까지 길이나고 결국 마낭까지 길이 나면서 트레킹 출발점의 면모를 잃어버렸다고했다. 버스를 내린 우리는 이때까지 트레킹 출발점을 정하지 못했고 라마라쉬가 차를 구하러 사라진 뒤에 길가 식당에서 요기를 했다. 시간에 맞춰 출발하는 버스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차를 타고 불불레까지 가서 걷기를 시작했던 지난 여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베시사하르부터 바로 걷기를 작정했다. 



베시사하르를 출발해서 불불레 까지 가는 길은 편안했다. 마르샹디강을 따라 형성된 길을 걷고 민가를 만나니 아직 우리의 걸음은 산에 들어가지 못했고 하루종일 마을길로 이어졌다. 길도 단순했고 멀리 설산이 우리의 목적지를 안내하니 그냥 멀리 설산을 보고 걷고 또 걸었다. 불불레가 얼마 남지 않은 길을 지나자 마을 잔치가 한창인 것 같았다. Basu에게 물어보니 이날이 구릉족에게는 '로사르'라고 하는 설날이고 이웃의 친인척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춤과 노래로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산업화의 댓가로 우리에겐 사라진 옛풍습을 낯선 안나푸르나 기슭에서  목격하게 되니 마음이 따듯해져 왔다. 흐뭇하게 바라다 보는 우리를 보고 춤 삼매경에 빠진 남성분이 손짓을 하며 우리에게 같이 할 것을 권했지만 오늘 가야만될 거리도 있고 실례도 될 것 같아 그냥 합장으로 인사하고 가던 길을 걸었다.



오늘 쉬었으면 하던 마을인 불불레를 도착했다. 지난 5년간 불불레는 강건너 동쪽 마을에도 찻길이 생기고 강과 롯지는 길로 갈라섰다. 집과 강과 마을이 한데 엉커 조화롭던 풍경은 사라지고 조금은 삭막하고 어설픈 불불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가 너무 변해 있어 왠지 서먹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바수와 라마나쉬는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다며  우리가 계속 걷기를 권했다. 트레킹 첫날은 무리하지 않고 몸을 푸는 정도만 걸고 불불레에서 묵을 예정이었지만 잠깐의 망설임끝에 Upper Nadibazar 까지 걷게되었다. 우리는 지쳤고 해가 떨어져갈 무렵 5시 반이 넘어서야 낡고 허름한 롯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롯지는 마음에 들지 않았고, 첫 숙소 선정부터 가이드에게 속은 느낌이 들었다. 



불불레 지나면서 언제부턴가 우리의 포터들과 동행을 하게된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이 롯지의 주인이었다. 나는 와이파이와 온수가 되는 롯지를 원했지만 가이드는 곤혹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아마도 롯지 주인의 호객에 넘어가 여기까지 무리해서 왔는데 우리는 불만스러워 보였고, 그렇다고 다른 롯지를 찾아 나설려니 해는 떨어지고 이 롯지 주인에게 미안하기도 해 곤란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일 부터는 숙소 결정에 좀더 관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라운드 첫 숙소인 Upper Nadhibazar의 Annapurna Garden Restaurant & Guesthouse라는 이름의 남루한 롯지에 짐을 풀었다.

 


롯지 건물은 시설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양철과 폐목재로 지어 비와 바람을 가리는 수준이었다. 녹슬고 구겨진 양철로 얼기설기 꾸린 움막수준의 건물은 그렇다고 해도 눕기에도 겁이 나는  곰팡내 나는 침대는 사실 받아들이기 불편했다. 그래도 그물망 창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밤바람은 막아야할 것 같아 특별히 주인게게 부탁해 받은 얇고 작은 천을 스카치 테이프로 발라 잠자리를 갖추었다. 다이닝 룸에서 주문한 식사를 받았는데 역시 손님이 거의 없는 시즌이니 식재료가 잘 갖춰줘 있을 리가 없고 음식은 초라했다. 



하지만 이 모든 악조건에도 주인 내외의 친절은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당신들을 우리 집에 모실 수 있어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찌그렸던 인상을 펼 수밖에 없었고, 아무런 불편함도 없고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말뿐이 아니고 시설이나 물질로는 할 수 없는 띠뜻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했다. 준비한 식사가 맛이 없지는 않은지를 묻고, 빈 접시를 채워주고 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나가자 온기가 있는 부억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젊어서 요리사로 바같 세계를 떠돌았다는 낯선 네팔리 한분을 포함해 모두가 모닥불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둘러 앉아 라운드의 첫 저녁을 맞았다. 



나디에서의 낭만적인 모닥불 파티는 일찍 끝났다. 자리를 같이했던 롯지 주인과의 관계는 알 수 없었던 네팔리는 우리에게 친절하고 우호적이었다. 미국에서 피자가게에서 일을했다며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우리를 붙들고 끝임없이 영어를 늘어놓았다. 그는 마리화나를 하고 우리에게 권하기도 했다. 분위기에 젖은 바수는 락시를 들이키고 어느 순간 수다스러워졌다. 마리화나에 취한 네팔리와 술에 취한 바수가 자리의 분위기를 일찍 흐려놓는 바람에 다뜻한 모닥불의 아까운 불씨를 포기하고 침실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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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연맹 2017년 하반기 정책안(초안)

2017/6/21

20151114, 전농이 제안하고 주도한 민중총궐기와 이로 부터 촉발된 촛불 투쟁은 박근혜 일당의 축출과 민주당 정부 집권으로 마무리되었다. 전농은 투쟁의 전과정에서 상황을 주도했고 특히 전봉준투쟁단의 활약은 대중적 관심과 지지를 끌어내고 촛불 투쟁의 열기를 고양하는 견인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물론 아쉬움도 남는다. 촛불투쟁을 주도했지만 정치적 민주화와 개혁 이슈에 묻혀 농업 독자적 이슈의 대중적 제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근혜 탄핵과 이로 인해 출범한 민주당정부는 우리 농민에게 누적된 농업적폐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극단적으로 반농적인 이명박근혜 8년의 암운이 물러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진입함으로써 백남기농민 죽음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어느 선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농정에서도 최소한 이명박근혜식의 밀어붙이기 농민 말살정책은 추진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시장중심주의와 개방농정이라는 토대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한계에서 민주당정부에서 취할 수 있는 농민의 이익이 무엇인지 하는 고민과 함께 탈시장탈개방시대의 농업을 어떻게 준비해 나갈 것인가는 과제를 안고 있다.

문재인대통령은 후보시절 "현제 농어업, 농어촌의 위기는 경쟁과 효율만 강조하고 추구해 왔기 때문"이라며 농정철학과 기조를 지속가능성으로 바꾸겠다고, “농민의 삶이 나아지는 것이 제1과제라고 선언했다. 나아가 생산조정제 등을 수단을 통한 쌀값보장정책, 보조사업 중심에서 벗어난 직불금 강화, 농업특별위원회 설치, 농어민 산재보험도입, 농산물 최저가격안정제, 자치농정을 위한 농어업회의소의 전국적 설립 및 입법을 공약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현 농업농촌 문제를 직시하는 바람직한 시각의 전환이라고 여겨지나 구체적 정책방안에 대해서는 철저한 검증과 감시가 요청된다. 특히 감축을 전제한 쌀값보장이나 최저가격안정제는 지금까지 전농이 요구해온 생산 감축 없는 쌀값 및 농산물 가격 보장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고, 직불금 강화는 농민기본소득과도 일정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자체 진일보한 정책으로 향후 정부와 협상과 투쟁을 통한 간격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진행된다면 의미 있는 성과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

촛불투쟁의 승리와 민주당 정부의 출현은 농민의 이익을 일정정도 관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면서 또한 농민운동의 현제를 직시하고 내부적 혁신을 단행해야할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재생산구조가 무너진 농민회 조직은 인선 때마다 골머리를 앓고 있고, 관성적 운동이 변화된 조건에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운동의 활력이 소진되고 있다. 당면과제에 전략적 과제는 묻히고 수입개방반대 투쟁의 절박함이 농업농촌의 새로운 상을 모색해하고 운동의 방향성을 잡아가야하는 노력을 밀쳐두게 했다. “농민대회등 집회중심의 활동에 비해 빈약한 일상활동은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회적 경제 운동에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농민회를 농민대중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반핵, 환경, 여성, 문화를 비롯해 지역의 정의를 세우고 지역공동체의 다양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야할 농민회는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투쟁이어야 하는 일상적 투쟁의 장에서 후퇴했다. “가족농을 기반한 농업의 협동화현장중심의실 용성 있는 농업기술을 개발하고 농민교육을 전문화하는 일은 강령에만 존재하고 우리의 실천에서는 사라졌다.

따라서 변화하지 않으면 전농의 미래는 없다는 절박함으로 회원동지 각자의 분발은 물론이지만 농업농촌의 미래상을 세우고 방향성을 찾는 각고의 노력과 조직의 정체성, 운영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요구된다. 이에 전국농민회총연맹 경북도연맹은 현 내외적 상황에 대한 절박함을 가지고 2017년도 하반기 주요 정책안을 다음과 같이 제출한다.

(헌법개정/정책적다변화/사회적경제구축/일상투쟁의 복원/자치농정추구/농민수당실시/지역현안투쟁)

1. 정책적 다변화가 요구된다. 수입개방반대 투쟁 일변도에서 반핵, 환경, 여성, 평화 등 다양한 의제를 포괄하는 정책 과제를 모색한다.

2.구호에 머문 대중속으로라는 과제를 대중과 함께 사회적 경제와 협업농업의 기반을 구축하는 투쟁에 앞장선다.

3. 정치편향에서 벗어나 생활 속의 일상투쟁을 활성화한다. 봉건적 성차별을 일소하고, 농민의 교육 문화적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데 앞장선다.

4. 자치농정을 위한 투쟁을 일환으로 농어업회의소에 적극 참여한다.

5. 농민의 삶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농민수당제도의 도입을 위해 노력한다.

6. 농민참여의 확대를 통해 지방정부의 자치와 민주적 운영을 위해 투쟁하고, 지역 현안 해결의 선봉에 선다.

7. 이 모든 과제에 앞서 농업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높이고, 농업 재건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내기 위한 다양한 선전을 진행하고 궁극적으로 헌법에 농업농촌의 공익적 기능을 조문으로 넣을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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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도연맹 2017년 하반기 정책 토론자료


- 2017.06.18 

-2015년 민중대항쟁에서 촉발된 촛불 투쟁은 박근혜 일당의 축출과 민주당 정부 집권으로 마무리됨.

- 그 과정에서 농민회는 자신의 이익을 충분히 관철하고 상황을 주도했는가는 평가와

문재인정부의 성격 규정과 향후 농민회의 활동방향 정립, 정책수립이 요구됨.

이에 대선과정에서 전농의 파행과 민주당정부의 농업관련 공약을 먼저 검토함으로써

농민회 내부적 혁신과제를 수립하고

하반기 투쟁과제 및 목표를 설정함

 

[촛불투쟁과 대선과정에 대한 평가]

- 2015년 민중대항쟁을 주도한 전농은 이후 전개된 촛불투쟁에서도 상황을 주도하며 특히 전봉준투쟁단의 투쟁은 대중적 관심과 지지를 끌어내고 투쟁의 열기를 고양하는 견인역할을 수행함.

하지만 그 과정에서 농업문제를 얼마나 대중적으로 제기했는가는 별도의 평가가 요구됨

촛불 상황을 주도했지만 정치적 민주화, 정치적 개혁 이슈에 묻혀 농업 독자적 이슈제기에는 한계를 보임

박근혜 축출이후 대선과정에서 특정 후보 지지를 위한 전농 임시대대 요청과 이에 대한 보이콧이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조직에 심각한 상처를 남겼는데 이에 대한 평가도 중요함

양쪽의 정치 행위는 합법적이고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표현과정으로 문제가 없는가는 문제와

이를 떠나 단지 임시대대 제출 안건의 타당성 유무가 문제인지 판단이 요구됨. 다시말해 김선동 지지라는 정치적 판단이 옳은지 거른지 평가가 필요하고

그와 별개로 그 결정의 주체가 전농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관철할 만치 전농이 정치적으로 장악되어 있는지 균일한 정치적 집단인지 하는 판단 없이 무리하게 진행

결과적으로 임시대대는 무산되고(소집동의자보다 참여자가 훨씬 적어 정족수 미비) 전농내 극심한 분열상만 노출됨.

김선동(민중연합당)후보의 선거결과도 초라한 성적표만 얻음(조원진, 김민찬에도 밀려 27천표에 (0.1%) 7)

대선에 임해서도 전농집행부의 김선동 지지편향은 광범한 농민의 관심과 지지를 대선판으로 끌어오는 역할을 놓치고, 농업관련 이슈제기나 과제설정에 실패함

전농내 정치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공통된 농업과제를 각 후보를 통해 관철하는 방식이 보다 타당함.

또한 민중연합당이 농민이 지지해야 될 유일한 대중적 진보정당인가 여러 당들 중 하나인가는 평가가 필요하고 연대의 범위, 방식 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함.

민중연합당과 별개로 현재 몇몇 정파 중심으로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이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고 전농이 이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정한 상황인데(?) 과연 타당한 정치적 결정인지 검토가 요구됨

별도의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 과업이 전농이 당면한 긴급한 현실적 실천과제인가, 또한 전농 조직 내적으로 준비되고 이 과제를 수행할 주체적 역량은 있는가, 그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이 농민의 이익을 관철하고 전농을 강화하는 과정과 일치하는가 살펴보아야함.

당위로 주여진 대중적 진보정당운동과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농민당에 대한 로망이 있어 왔고 한편으로는 현실적 대안으로 민주당 같은 중도우파나 정의당 노동당 같은 정당과 연대하는 선택도 제기된다.

더 근본적으로는 대중조직의 정치참여방식에 대한 본질적 검토가 요구된다. 대중조직과 정당의 정체성은 분명히 다르고 대중조직은 훨씬 광범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포괄하는 조직이어야 함에도 이를 혼동함으로써 오히려 전농내 정치 혐오를 부추키고 조직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본다.

[문재인정부의 농정공약과 농민회의 대응]

- 문재인 정부의 출현이 농민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 극단적으로 반농적인 이명박근헤 8년의 암운이 물러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진입함. 백남기농민 죽음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어느선에서 이루어질것같고, 농정에서도 최소한 이명박근혜식의 밀어붙이기 농민 말살정책은 추진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됨. 근본적으로 시장중심주의, 개방농정의 토대는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이나 이 한계에서 민주당정부에서 취할 수 있는 농민의 이익이 무엇인지 고민이 필요함.

문후보시절 "현재 농어업, 농어촌의 위기는 경쟁과 효율만 강조하고 추구해 왔기 때문"이라며 농정철학과 기조를 지속가능성으로 바꾸겠다고함. “농민의 삶이 나아지는 것이 제1과제라고 발언.

 

- 문재인 정부의 공약 핵심은

· 경쟁력중심주의에서 농촌의 유지 보전, 농민 삶의 지속성에 방점을 두고

· 쌀값보전정책을 우선적으로 하고

· 일반보조사업중심에서 직불금 강화로 농정의 축을 옮길 것으로 보여짐

 

정부의 농정의 방향에 대해서

· 경쟁력중심에서 사람중심의 농정으로 전환은 지지

· 쌀값 우선 보전정책도 한국인에게 쌀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할 때 이해됨. 전체 농업생산액의 17%를 차지하고, 농가의 58%가 쌀농사에 참여하는 주요 작목.

· 직불금 강화에 동의 하나 농민수당으로 까지 나아가야함 : 농업예산 14조의 14%2조정도가 직불금. 이중 80%가 쌀에 집중. OECD평균의 1/5수준. 가구당 월20만원 농민수당 지불시 3~4조 예산 필요. 6~7조정도가 보조사업형태로 간접 지불되고 있고 이를 합리화하는 것만으로도 농민수당 단초마련가능. 문제는 대국민 설득!

 

- 민주당농업공약 각각에 대한 검토 필요하다.

· 대통령이 농업을 직접 챙기겠다-농업특별위원회 설치

· 쌀생산조정제 등으로 쌀농사지킨다 : 감산을 전제한 가격보전정책

· 농업재해대책법강화 : 극심한 우박피해로 현안으로 대두, 농업재해보험법의 문제 해결?

· 농산물최저가격안정제,직불제 확대로 농가소득향상 : 지방정부에서 시작한 최저가격보장조례를 박근혜가 중복지원을 핑계로 저지. 새정부에서 다시 활성화될것으로 예상.

하지만 농업소득이 농가소득의 27.1%수준에 불과한 10068천원(2016년통계). 농촌에서 농업 소득이 30%이하라는 사실은 우리 농촌이 처한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줌.

· 농어민산재보험도입/여성농업인권리복지확대 : 농업재해율 일반산재의 2/ 사보험인 농작업안전보험이아니라 공적재원의 의무가입

· 농협유통기능강화 : 방번론이 문제. 현재 농산물 소매시장의 12~3%정도 농협이 장악.

· 농어업회의소 전국적 설립, 법적 뒷받침 : 농업 현장의 목소리 종책적 반영, 농민조직화의 방안이 될 수 있는가는 검토 필요. 현재 시범사업 지역의 사례연구필요.

 

[도연맹 내부 혁신 과제]

 

도연맹 내부적으로 볼 때 조직 진단사업을 계획하고 있고, ‘위기에 대한 인식은 공유하고 있다고 보여짐

지회부터 군,도연맹까지 조직의 생명력이 고갈되어 인선의 어려움에 처해있고

인적 부족으로 업무자체가 진행되지 못하고

관성적 운동이 변화된 조건에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운동의 활력이 소진되고 있다.

농업농촌에 대한 미래상 설정에 실패하고, 운동의 방향성을 잡지 못하고

각종 생협, 협동조합, 마을기업 등등 사회적 경제 운동이나 플리마켓, 지역 공동체 문화운동 등을 포괄하는 포섭력이 없다보니 지역 현장에서 기득권으로 부터는 물론 농촌의 새로운 흐름으로부터도 외면당하는 이중으로 고립된 상황이다.

농민대회등 집회 중심의 활동에 비해 일상활동이 너무 빈약하다. 이슈가 없으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농민회의 활동이 위축된다.

군정과 의정을 감시하고, 지역사회의 정의를 세우고, 지역의 환경을 지키고, 지역의 언론을 만들어나가며, 지역공동체의 다양한 문제에 일상적으로 참여하는 농민회의 활동상 정립이 요구된다.

그렇게 변화하지 않으면 솔직히 농민회의 미래가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회원동지 각자의 분발은 물론이지만 농업농촌의 미래상을 세우고 방향성을 찾는 각고의 노력과 조직의 정체성, 운영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없다면 조직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이에 현 상황에 대한 절박한 인식을 가지고 조직을 살리고 우리 농업과 농촌을 구한다는 절실함으로 향후 사업계획을 수립해야한다.

 

[경북도연맹 2017 하반기 주요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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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4일 복통 중에 짐을 싸서 닥신칼리를 거쳐 파르핑에서 하루를 접고, 25일 분가만티를 통해 다시 파탄으로 복귀 1박을 하고, 26일 카트만두의 숙소 마야거르츄로 돌아가 이후 여정을 20여일동안 같이할 또 다른 일행 M과 D를 맞았다.

 

전날 복통으로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사이 L은 타멜 거리를 카메라에 담으며 혼자 돌아다녔다. 계속 숙소에서 밍거적 거리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웠고, 어렵게 네팔에서 만난  L을 고려해도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타멜만치 친숙해져 버린 라트나 버스파크로 향했다. 일차 목적지를 Shree Dakshinkali Temple로 정했다. 버스를 찾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고 일부노선이 파업 중이었지만 다행히 닥신칼리행은 운행 중이었다. 

 

 

닥신칼리로 가는 길은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비포장길이었다. 앞을 분간하기 힘들만치 두터운 먼지가 일고, 엉성한 창틀을 통해 실내로 밀려 들어왔다. 마스크를 했지만 숨쉬기가 쉽지 않았다.  차안의 공기는 탁했고 그렇다고 창문을 열 수도 없는 두어시간을 견딘뒤에야 닥신칼리 입구의 버스파크에 도착했다. 먼지만 아니었으면 버스를 타고 온 2시간이 나름 즐거운 여행길이었을테고, 바같의 풍경에 좀더 몰입할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쉬웠다. 사실 여행 중에 사전 공부 없이 만나는 풍경은 무미건조할 수 있다.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스토리를 입히고 나의 기억 속에 저장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정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바라다보는 풍경일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고 나의 것이 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사실 그런 면에서 닥신칼리는 나에게 미지의 장소였다. 제물로 희생된 동물의 비피린내가 진동하는 끔직한 흰두사원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이해도 없었다.

 

닥신칼리는 외래 관광객이 그리 많이 찾지 않는 곳 같았다. 버스를 같이 타고온 승객들은 대부분 현지인으로 사원에 참배를 오거나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나들이라도 온것 같았다. 한무리의 젊은 아가씨들이 버스에서부터 우리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낯선 외국인을 보고 반갑고 호기심이 일었는지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갈건지 등등을 물었지만 우리의 영어는 짧고 단편적인 대화를 넘어설 수 없었다. 버스파크에서 내리자마자 현지인이 가는 식당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사원을 향해 걸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계곡 속에 '피비린내 나는' 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날은 재물을 희생하는 의식이 많지 않은 날인지 핏빛 바닥을 맨발로 지나가야하긴 했어도 직접 살육장면을 보지 못했다. 흰두교도가 아닌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는 성전도 바로 옆의 통로를 지나며 볼 수 있었는데 선입견이 준 느낌 때문에 오래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사원을 지나 오르막을 한참 올라 전망대가 있었지만 전망대로 올라가는 입구의 기념품 가게와 노점상을 구경하며 그들의 삶을 느끼는 것 만으로도 닥신칼리 방문은 충분했다.

닥신칼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파르핑을 물어 걷기 시작했다. 한번씩 차가 지나갈 때 마다 바람방향을 살피며 먼지를 피해 뛰어야했는데 다행스럽게 길은 멀지 않았고 파르핑 시내는 금방 나왔다. 많지 않은 네팔 여행중에 만난 도시는 늘 사원과 사원을 찾는 순례객을 위한 숙소가 혼재되어 었다. 생활과 종교를 따로 데어놓을 수 없을 만치 삶이 종교와 밀착되어 있는 것 같았다. 파르핑도 다르지 않았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을 지나 신시가지로 접어들기 전에 만난 숙소를 다 지나치고 막상 숙소를 찾기 시작할 무렵에는 마땅한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산한 가게앞에서 현지인에게 숙소를 물었더니, 네팔에서 늘 그랬지만 주변의 사람들이 다 몰려 들어 나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 의견을 모았다. 네팔리의 친절함은 내가 경험한 세계에서는 의문의 여지 없이 최고였다.

숙소를 잡고, 창을 통해 해지는 파르핑의 삶을 바라다 보면서 하루를 정리했다. 타멜거리를 떠나 닥신칼리를 경유해 파르핑까지 많은 풍경을 하루동안 스쳐 지나쳤다. 나에겐 풍경이었지만 그곳에 터잡아 살아가는 네팔리에게는 구구절절한 삶의 현장일진대 여행자의 눈으로 오늘 하루 그들의 삶을 모욕하지 않았기를 빌었다. 그리고 낯선 나라를 이렇게 여행자로 떠돌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축복이거늘 나는 왜 늘 나의 삶을 스스로 부정하고 탈주를 꿈꿀까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일상이 주는 안락함과에 겨워 방랑의 낭만을 갈구하는걸까? 나는 진정 무엇에 목말라하는지 스스로 물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남은 일정의 여행은 순례가 되어야했다.

안개속을 번져오는 노래소리에 눈을 뜨며 parphing의 아침을 맞았다.  신을  찬미하고 새로운 하루를 맞은 생명의 환희를 담은 어린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에 여학교 기숙사라도 있는건지 아니면 사원에서 들려오는 소린지 알수 없었지만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나에겐 그냥 파르핑 전체가 사원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방을 나와 아침 햇살에 삶이 피어나는 파르핑의 시가지를 내려다 봤다. 게스트하우스 4 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앞집 옥상에는 향을 올리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어떤 신에게 무엇을 축원하고 소원했을까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단지 어둠을 이기고 아침을 맞는 모든 삶앞에 우리는 숙연해진다는 사실을 알수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안녕과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의 안녕과 존재의 기쁨을 축원했을 것이라고 믿어졌다.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인근의 바라이요기니 템플을 향했다. 나의 새벽잠속으로 달콤하게 녹아들었던 찬송이 사원에서 울려나왔다. 이제는 어린 여학생의 목소리가 아니라 삶의 경륜이 묻어나는 탁한 목소리였다. 가사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찬송이지만 그 절실한 축원의 마음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찬송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도 싶었지만 그냥 마음에 담고 사원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자 맞닥뜨린 남루한 요들의 불편한 적선요구를 외면하고. 계단 모퉁이에서 농산물을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들과 눈을 맞춰 웃음을 나누고 도로를 만나는 길모퉁이 까페에서 아침을 청한다.

 

 

분가마티는 지도상 직선거리로 얼마되지 않았지만 파르핑과 분가마티를 가르고 있는 바그마티 강 때문일까, 마땅한 버스 노선을 찾을 수 없었다. 파탄까지 나가서 다시 분가마티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택시는 어떻게든 분가마티로 바로 갈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물어보니 한 기사가 선듯 나서주었다. 안도하며 올라탄 택시는 카트만두 쪽으로 달리기만 하고 분가마티는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기사도 나중에는 길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지 지나는 다른 기사나 주민에게 묻기 시작했고, 다시 방향을 파르핑 쪽으로 잡아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결국은 분가마티에 도착하지 못한 택시는 우리를 한적한 강가의 철제 다리 근처 마을에 내려놓고 도망가듯 사라져 갔다.

 

 

걷기 위해 온 네팔이니 우리는 개의치 않고 걷기 시작했다. 강이라기 보다 하수구에 더 가까운 바그마티 강을 건너고 다시 강을 따라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한참을 헤메야했다. 강을 벗어나자 연두색으로 살아나는 밭둑길이 나오고 멀리 시가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1월에 불과해지만 아열대기후인 네팔의 들녘은 벌써 봄를 닮아 있었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전원 도시로 알려진 분가마티로 향하는 들길은 아름다웠다. 겨우 길을 찾고 따가운 햇살을 맞으면 오르막길을 올라 분가마티를 만났다.

 

도착한 분가마티는 남루했다. 지난 지진의 여파때문일까, 시가지 자체가 여느 다른 도시와는 달리 낡고 지저분했다. 뿌연 먼지를 뒤집어 쓴 건물들은 위태로웠고, 방치되어 있었다. 인적이 드물고 생기없는 골목길을 돌아 겨우 물어 찾아간 민속박물관은 초라했다. 지금까지 카트만두나 포카라를 중심으로 주요한 도시만 돌아다닌 끝에 처음으로 관광루트에서 벗어나 만난 도시가 분가마티가 아닐까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까지는 네팔의 허상들이었고, 분가마티가 네팔의 진상이란 말인가, 알수 없었다. 버스파크 근처에서 너무 싼 가격에 놀란 식당에서 모모와 사모사 그리고 콜라로 점심을 해결하고 파탄행 버스에 몸을 맡겼다.

 

5일만에 다시 찾은 파탄이 반가웠다. 편한 잠자리와 풍부한 먹거리가 있고, 사람들의 활기와 아름다운 건축물이 즐비한 파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찼다. 지난 몇일간 계속되는 복통으로 체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마땅히 먹을 것도 없었는데다가 무얼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일을 지내다보니 실제보다 훨씬 긴 여정을 다녀온듯 몸도 지쳤고 마음도 처졌다. 그래도 긴 흥정 끝에  Lalit Heritage Home에 짐을 풀었다. 파탄 드바르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환상적인 조망의 룸에서 짐을 풀자 메니저가 커피를 날라왔다. 고마운 마음에 팁을 건넸지만 팁이 호텔비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며 사양했다, 고맙고 기분 좋았다. 커피향을 맡으며 아름다운 건축물이 조화롭게 모여있고 그 사이를 살아가는 인파를 행복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다 보다 어둠이 내리는 파탄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갔다.

 

처음으로 파탄에서 아침을 맞았다. 역시 신을 경배하는 찬양소리에 이른 잠을 깼다. 작고 아기자기한 룸때문인지 편안하고 아늑한 잠자리를 누렸다. 간혹 도시의 밤하늘을 울리는 개짓는 소리에 잠을 깨기도 했지만 나의 숙면을 방해하지 못했다. 밤새 도시를 뒤덮던 개울음 소리는 아침을 알리는 서광이 비치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찬양소리 사이로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기척이 늘어만 갔다. 방을 나와 옥상을 올라갔다. 소박한 정원 넘어 파탄 두바르 스퀘어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새 보이지 않던 숙박객들이 조식을 들기 위한 다이닝룸에 부쩍였다. 모처럼 한국인들도 만나고 지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지원온 일본인들도 있었다. 일어를 하는 L은 일본인들을 고향사람 만난듯 반가워 대화를나누었다. 외국어가 절실해 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M과 D가 도착하고 안나푸르나 라운드를 준비하는 여정의 터닝 포인트에 도달하는 날, 우리는 타멜거리로 되돌아 가기 위해 Heritigi Home을 나섰다.  

교통체증으로 한국같으면 살인이라도 날것 같은 골목을 지나 타멜행 버스를 찾았다. 다시 돌아온 타멜거리를 걷고 숙소 마야거르츄에 짐을 풀었다. 일정 없는 하루를 한가롭게 보냈다. 오후에 M과 D가 도착해 반갑게 맞고 다시 타멜 거리로 나섰다. 타멜거리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는 Shop Right Supermarket에서 트레킹 물품을 사고, 한국에서 일했던 네팔 노동자가 운영한다는 Small Star 주점에서 뚱바(Tungba)를 마셨다. 뚱바는 수수같이 보이는 꼭또라는 곡물을 발효해 통에 담은 뒤 뜨거운 물을 붓고 빨대로 마시는 네팔만의 술이었다. 왠지 술에 흠뻑 젖고 싶은 날이지만 불편한 속과 다음 여정을 위해 참았다. 

 

두달 여정의 절반이 지나는 밤 침대에 누우니 많은 생각들이 일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그치듯 묻기 시작했다. 나는 네팔을 또 올까? 올 수 있을까? 오고싶을까? 아무 대답도 가능하지 않았다. 너는 네팔에 뭐 하러 왔지? 왜 네팔을 그토록 목말라했지? 질문은 이어졌지만 심경만 복잡해 질뿐 답을 구할 수 없었다. 나에게 네팔은 내 삶의 알리바이인가? 나의 순수를 보증해주는 방패일까? 위장막 혹은 화려한 목걸이같은 장식일까? 먼지와 차가운 방, 입에 맞지 않는 먹거리를 감수하고도 네팔을 찾은 나는 내 자신에게 얼마나 정직한 것일까 문득 묻고 싶어졌다.  집이 그립고 딸이 보고싶고 뽀득뽀득 윤기나는 접시에 상큼한 야채를 담은 그런 식탁보가 있는 아침이 그리워졌다. 아직 한달이나 남았잖아! 문득 조갑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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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 아침, 뷰띠크 호텔 체크아웃하고 택시로 마야거르츄로 이동하여 짐을 풀고, 왕궁박물관과 파탄을 돌아다니고, 22일 공항에서 앞으로 일주일 여정을 같이할 L씨를 맞이하고 타멜에서 시간을 보낸 뒤, 복통을 만나 23일 내내 방에서 보냈다.


100리터 배낭 두개와 두사람이 소형 택시를 타고 마야거르츄가 있는 수어러꾸떼로 향한다. 5분만에 도착한 마여거르츄는 트레커들이 다 떠나고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혼자 계신 관리자분께 인사만 하고 방으로 짐을 옮긴뒤 단촐한 차림으로 Narayanhiti Palace Museum으로 향한다. 타멜거리를 지나고 Garden of Dream을 지나 10시가 조금 넘어 박물관에 도착했다. 11시에 문을 연다니 30분이나 남은 이른 시간이지만 가족나들이객들로 붐비기 시작했. 주변을 둘러보니 안내문이 있고 박물관 입장을 위해 지켜야하는 규칙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상당히 위압적이었. 역시 권위적 권력의 소산이겠지만 왕은 죽었고 왕정은 무너졌으며 좌파 민주정부가 들오선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네팔은 변화를 시도하는 단계에 머물러있는 듯 보였. 거리에서 가장 당당하고 멋진 사람이 총을 든 군인이거나 경찰인 국가에서 시민은 늘 초라하다. 사실 카트만두가 그랬다.

 

박물관은 네팔의 마지막 왕인 가렌드라가 폐위되는 2007년 까지 살던 왕궁이지만 2008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박물관으로 공개되었다고 한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문을 여는 박물관은 입장을 위해서는 엄격한 소지품 검사를 받고 가방은 물론 촬영을 못하도록 핸드폰까지 맡겨 놓아야 했다. 내부관람 중에도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고 관람을 방해받지는 않았다. 박물관은 나름 볼거리가 풍부했고, 여행객이라면 한번쯤은 들러 네팔 왕실의 삶을 통해 네팔 문화를 이해하는 기회를 가져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을 통해 나는 네팔이 고립된 왕국이 아니라 세계와 풍부한 교류를 한 개방적인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네팔의 역사에 대해 충분한 지식없이 왕궁박물관을 둘러보니 그야말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구경'이상이 될수 없었다. 단지 네팔 혁명과 왕정의 붕괴과정에 대해 일말의 뉴스라도 접해보았다고 비렌드라 왕의 일가가 아들 디펜드라에 의해 살해된 현장을 둘러볼 때는 왠지 모를 섬뜻함이 느껴졌다. 공식적으로는 왕자 디펜드라가 사랑한 인도 여인과의 결혼을 반대한 부모에 대한 반감으로 술과 마약에 취해 총기를 난사한 사건으로 정리가 되었다고한다. 하지만 비렌드라의 동생으로 비명횡사한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러받은 가렌드라의 음모라는 설을 민간에서는 더 믿고 있었다. 어쩌면 민중의 혁명열기에 국토의 대분분이 장악되고 대도시만 간신히 남아 있던 상황에서 왕정의 종말을 예감한 디펜드라의 광기가 발로되어 일어난 사건이 아닌가 싶기도했다. 종말은 에견되어 있었고 그 악역을 디펜드라가 맡은 것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Narayanhiti Palace Museum을 나와 카트만두밸리의 세왕국중 하나였던 파탄을 향해 남쪽으로 걸었다. 5~6km나 되는 잛지 않은 거리였지만 택시도 버스도 마다하고 걷기로했다. 안나푸르나를 걷는 것과는 달리 혼탁한 공기를 마시며 걷는 도심 트레킹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여행자의 거리라는 타멜을 벗어나 그야말로 카트만두의 날것 그대로를 느끼고 싶었다.  mapsme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하염없이 걸었다. 앱의 특성때문이겠지만 미로같은 골목길을 오고가는 네팔리와 어깨를 부딪고 만나는 꼬마들과 눈을 맞추고 미소를 주고 받으며 걸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서있는 곳이 어디인지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다시 길을 이어주는 앱 덕분에 어느새 바그마티강에 이르고 강을 건너자 UN공원이라는 곳이 나왔다. 청춘 남여들이 데이터를 하는 곳이지만 청춘이 지난 우리 부부도 나무 그늘을 찾아 들어 간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Patan은 산스크리트어로 Lalitpur라고 하고 City of Beauty라는 의미라고 했는데 역시 아름다운 도시였다. 카트만두와 박타푸르 그리고 랄리푸르가 공존하던 시절 전쟁 대신에 서로 도시를 아름답게 가꾸는 걸로 경쟁했다고 한다. 그 덕분이겠지만 랄리푸르 역시 박타푸르나 카트만두 못지 않은 아름다눈 건축물들이 듀바르 광장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듀바르 광장은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이날은 체크 없이 입장이 가능했다. 특별한 날이었는지 근무자가 자리를이탈한 건지 알수 없는 이유로 입장료없이 두바르거리들 들어섰다. 5년전의 기억을 더듬어 지난 지진의 흔적을 찾았고, 사라진 건축물의 빈자리도 보이고 여기 저기 복구공사가 한창인 곳도 많았지만 그나마 도시의 경관 전체가 주는 느낌은 손사되지 않고 살아있는 것 같아 무척 다행스러웠다. 거리는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무심한 표정과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관광객의 호기심 어린 눈이 어지럽게 교차하고 있었다.  아내는 아름다운 거리를 스케치하고 나는 현지인의 무료한 표정으로 파탄의 골목골목을 걷고 오후 늦은 시간에 어렵게 버스길을 물어 타멜로 돌아왔다.

 

1월 22일, 한국에서 쿤밍 여행 끝에 카트만두로 들어와 우리랑 합류하기로 되어있던 L님이 오는 날 공항 마중 말고는 특별히 정해진 일정이 없었다. 수어러꾸떼 골목의 가게에서 장을 보고 직접 조리를 해서 식사를 해결하고 빨레를 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은 가고 도착 예정시간인 오후 4시 30분이 다가오자 숙소에 부탁해 택시를 불렀다. 공항까지는 금방 도착했어야 했지만 길이 막혔고 차는 돌았다. 혹시라도 낯선 공항에 먼저 도착해 헤메지나 않을까, 호객꾼들에게 혼줄이나 나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역시 네팔의 만만디 수속 덕분에  무리없이 만날 수 있었다. 외국서 만나서 더 반가운 상봉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풀고 타멜을 지나 북한 식당 옥류관으로 향했다. 모처럼 한국서 온 지인과 북한 동포가 서비스하는 한식을 신나게 먹고 내게 주어진 삶에 감사했다. 

1월 23일의 아침을 맞기위해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했다. 전날 북한식당 옥류관에서 먹은 음식이 문제를 일으켰다. 전날 옥류관에서 보낸 즐거운 기억은 악몽으로 변했다. 복통과 설사 오한에 현기증까지 거의 탈진한 채로 아침을 맞았다. 주문한 음식을 대신해 권유한 육개장이 문제인것 같았다. 육개장을 전혀 먹지않은 L은 아무 문제가 없었고, 조금 먹은 와이프는 배탈 정도에 머물렀고, 거의 대부분을 먹은 나는 완전히 초죽음이 되었다. 가져온 비상 약을 먹고 숙소에 부탁해 네팔 약국에서 사다주는 약까지 먹었지만 몸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를 완전히 침대에서만 지내고 나서 극심한 오한과 현기증에서는 벗어났지만 음식을 조금만 입에 대어도 바로 복통과 설사가 잇달았다. 잘 먹고 살찌는 여행이라는 목표는 완전히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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