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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어촌공사 임원으로 나주생활을 시작한지 오늘로 2년이 지났다. 스스로 낯선 상황을 잘 이겨낼지 몰라 불안하게 시작했던 생활이 눈 깜짝 할 사이 지나가 버렸다. 지난 직장생활 2년을 되돌아보니 짧은 기간 동안 개인적인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출퇴근을 해 본지 너무 오래되어 그저 모든 게 새롭고 신기롭기만 했다. 몇 달이 지나자 내 역할에 대한 불안감이 일기 시작했다. 그저 월급이나 축내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퇴근 후까지 자료를 가져와 읽다보니 코피를 쏟기까지 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안정을 찾고 조직과 과업을 이해할 때쯤 되니 2년 임기가 끝나간다. 앞으로 작게는 두세 달 정도 남은 임기지만 남은 시간을 더욱 알차게 개인적인 성취와 조직에 대한 기여를 이루기 위해 분투해야 할 것이다.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나주로 오기 전에 맡았던 나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걸린다. 당연히 나하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같이 하던 분들이 어려움에 처하고 과제 수행에 곤란을 겪고 있다. 농사를 떠난 점 역시 마음에 걸린다. 다시 돌아가는 날 까지 사과나무가 기다려줄까, 살던 집이 온전히 견뎌내 줄까 늘 걱정이다. 이웃과 친구들 역시 떠나던 그 시점에서 가만히 나를 기다려주지 못할 것 같다. 친구 같고 친형 같던 몇몇 동네 형님의 부고를 받을 때는 내가 돌아갈 그곳이 이미 다른 곳이 되어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되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훨씬 많다. 기관에서의 근무 경험은 내가 현실을 이해하고 농업현장의 문제를 다시금 바라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조직을 이해하고, 농정의 결정과 집행과정에 대해 좀 더 날것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딸아이를 결혼시키고 농사를 떠나 도시생활을 누릴 기회를 얻은 것도 큰 행운이다. 이 모든 행운의 가장 상위에는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유능하고, 곧고, 올바른 직원들과 지난 2년간 같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무엇과도 바꾸기 싫은 소중한 기억이다. 특히나 닮고 싶은 존경하는 상사와 동료 임원들을 만난 것은 나의 큰 복이다. 세월이 지나도 추억이 되고 그리움이 되어 내 삶속에 영원히 같이할 인연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22년 2월 17일 첫 출근뒤 2년이 지난날 아침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지난 2년을 되돌아본다. 같이 해준 모든 인연과 나의 도전을 응원해준 모든 분들, 그리고 내가 외롭지 않게 나주생활에 동행해 준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2024년 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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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 줄 알았던 설 연휴가 다 지나가고 벌써 마지막 날이 저문다. 엄마와 형제 그리고 친구가 있는 진해를 잘 다녀왔고, 나주에서 충분한 휴식도 취했다. 빠뜨린 곳이 더 많지만 그래도 설치레 인사도 마쳤다. 어머니의 건강이 늘 걱정인데 잘 버터내고 계신 것 같아 다행스러웠고, 동심으로 돌아간 엄마가 하루종일 인형과 대화하고 노시는 모습이 이쁘고 또 슬펐다. 진해 친구들도 저마다 우여곡절을 안고서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어떤 친구는 이혼은 했지만 예술을 즐기는 삶을 살고 있었고, 또 어떤 친구는 암수술은 했지만 산책을 통해 걷기의 즐거움을 배워가고 있었다. 삶이란 게 다 그렇지만 희노애락의 날실과 씨실로 짠 슬픈 풍경화 같은 거 아닌가!

그래도 이번설의 최대 이벤트는 둘째형, 동생과 같이 창원의 대표산인 정병산을 올라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주 어릴 때 같이 놀던 기억 이후 어른이 되고 고향을 떠난 뒤 형제간에 한 번도 같이 어디 놀러가거나 여행을 한 적이 없다. 뭐 원수진 것도 아닌데 그를 수 있냐 의아하겠지만 어떻게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나만 빼고 나면 서로 이기려 들지 않는 착한 형제들인데 다 먹고 살기 힘들고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일정이 비록 반나절 산행이었지만 지난 시간을 회상하고 특히 어린 시절 형제가 같이 나누었던 기억 속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 되었다. 다음 휴가 때는 어디 리조트라도 빌려 4형제 모두 조카들까지 포함해 모일수 있는 자리 한번 주선하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내일 시작할 일상을 점치고, 업무를 점검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늦게 배은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늦게 시작해 맛들인 즐거운 직장이 나를 기다린다. 동백꽃이 막 터질 듯 부풀은 출근길을 따라 봄을 향해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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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던진 질문에, 기성세대로서, 후원회원으로서, 아빠로서 답합니다.
딸이 대학 졸업후 짧은 공백을 딛고 [노무현재단]이라는 꿈의 직장에 취직했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2006년에 있은 [전원생활페스티벌]에 귀농자 대표 가족으로 초정되어 존경하는 대통령을 뵙고, 2009년 5월 통한의 심정을 부여안고 봉하마을까지 운구를 따르던 송화가 다 자라 노무현대통령의 유지를 받드는 일에 종사하게 된 사실이 너무나 기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송화는 오랜 고민 끝에 퇴사를 결정하고 그런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노무현재단]의 문제를 폭로하는 일인 피킷시위를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딸과 고민을 나눈 댓가로, 그리고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청년에게 답하고 딸을 응원하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회운동의 목적이 정의롭다면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조차 정의로워야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운동의 과정은 그 운동을 통해 성취하고자하는 가치가 녹아들어가 있어야합니다. 저가 오랜동안 지지했고 후원했던 노무현재단이 설립 목적에서 이탈해 몇몇 명망가의 정치적 진출을 위한 징금다리로 이용되거나 몇몇 인사의 생계형 일자리로 전략하는 과정을 목도해 왔습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떠나가고 문제가 되었던 사람들이 견고한 아성을 쌓아가는 모습을 보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살아 돌아오신다면 지금의 노무현 재단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실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고 분노가 치밉니다.
노무현재단이 노무현의 정신과, 십시일반 후원과 자원 봉사 등을 통해 사람사는 세상을 앞당기고자하는 6만 후원회원의 꿈을 구현하는데 유능한 조직이 되지 못한 데에는 그동안 이사장을 위시한 이사진의 책임도 가볍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실제적인 운영을 책임져온 운영진의 책임이 무엇보다 클 것이라 생각됩니다. 조직의 비젼을 세워나갈 의지도 역량도 없는 이사진과, 그 가치를 구현할 운영 마인드가 전혀 없는 운영진이 조직의 숨통을 막고 조직의 구성원들이 지쳐 떨어져 나가도록 방관하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그렇다고 구성원들이 지금까지 거저 묵묵히 참고 견뎌온 것만은 아닙니다. 토론의 장을 요구해 반복적으로 조직이 가진 문제를 제기했지만 지금까지 하나도 개선되거나 진전될 조짐조차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많은 문제가 있지만 노무현재단이 가진 특수한 성격에 기인한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노무현재단이 노동중심의 가치를 구현하는 조직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간부는 생계형 일자리로 결정권을 끼어 차고, 어디 비례 국회의원이라도 한자리 얻을 궁리만 하고 있고, 말단 직원들에겐 ‘우리 때는 차비도 못받 고 활동했는데 너희들은 월급까지 받고 활동하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꼰대 정신에 충만해 열정 페이와 무한 봉사를 요구하는 반노동의 아성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이제라도 적극적으로 개혁을 강제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비단 노무현재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시민단체들이 직면한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제기가 왜곡되어 한 개인이 분란을 야기하는 문제로 낙인 찍히는 것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지만, 정치적 의도를 가진 일부 세력으로부터 노무현 정신을 폄하하는 데 이용될까 오랫동안 내부적 문제제기만 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부적 문제제기로 해결되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외부로 문제를 들고 나왔지만, 노무현 재단에 스며든 병징을 치유하고 백년 천년의 비젼을 가진 조직으로 거듭날 것을 기대합니다.
노무현재단이 더 이상 우리 딸의 직장일 수 없지만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도 굴종과 패배 속에 다음 일로 도망치지 않고, 정확한 매듭을 짓고 당당하게 다음으로 나아가는 딸을 보게 되어 무척이나 다행스럽습니다. 우리 딸의 희망대로 노무현재단의 겨울이 가고 봄이 활짝 피어나길 소망합니다. 그 봄을 앞당기는데 아빠로서, 기성세대로서, 노무현정신을 추구하는 후원회원의 한사람으로서 같이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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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감사를 겪으면서 제기되었던 문제들 중에 농지 임대차 관련한 과제를 고민해 보았다. 해당기관 임원자격이 아니라 순전히 한명의 농민으로, 개인 자격에서 생각을 정리해 본다. 거칠지만 생각을 나누고 싶어 글로 남긴다.

허울만 남았을 지라도 우리는 경자유전의 원칙을 헌법121조에 담고 있다. 헌번정신에 따르면 농지는 농사를 본업으로 하는 농민만 소유할 수 있다. 당연히 소작 제도 자체가 불법이다. 현실은 다르다. 농지의 절반 이상을 비농민이 소유하고 있고 소작제도와는 다르긴 하지만 농지 임대차는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니면 이 문제로 인한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 필수 농지를 공공적으로 소유(보유)하고, 민간에서 일어나는 농지 임대차를 공적으로 다루어 농민의 임대료 부담을 줄이고 영농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적 과업(공공임대용 농지매입사업)을 준정부기관인 한국농어촌공사에 부여해 수행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애초의 목적과는 다른 부작용이 일어나고 오히려 농어촌공사가 이 미션을 맡고 있는 상황에 대한 비난과 비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특히 이번 국정감사에서 농지공공임대차사업 관련해 받는 임대수수료(5%)와 직불금 대상 농지와 직불금 미대상 농지 간 임대수수료 요율 차등 적용하는 것을 두고 농어촌공사가 직불금을 부당하게  편취하는 것으로 비난 받기까지 했다. 사실에 대한 오해나 곡해, 비현실적인 요구나 서로 상충하는 입장이 실타래처럼 엉켜있지만 비판의 목소리를 집약해 보면 다음의 주장으로 요약된다.
“농어촌공사가 농지가격을 올리고 있다.”
“농어촌공사가 헌법정신을 위배하면서 지주역할을 하고 농지 임대업을 하고 있다.”
“공익형직불금을 농지 임대료 상승분으로 흡수해 농어촌공사만 배불리고 있다.”
 
하나씩 짚어보고 대안을 마련해 보자. 먼저 “농어촌공사가 농지가격을 올리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수요 증가는 가격 상승을 불러온다. 농지도 다르지 않다. 농지의 공공적 보유량 확대를 위해 예산을 집행하는 만치 농지에 대한 거래는 늘고 농지 값은 상승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그 정도인데 객관적 자료에 기반 해 비난받아 마땅할 만치 농지가격 상승이 초래 되었나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공적 매입에 따른 농민의 가격 기대치 상승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친 도덕주의적 입장일 뿐 아니라 이 과업을 수행하는 농어촌공사를 ‘농지가격상승의 주범’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정책적 무능을 만만한 공공기관에 전가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솔직히 농민이 가진 유일한 자산이 농지다. 서울의 아파트값 상승에 비해 농지값 상승이 지나치다고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도 이미 옛말이다. 이제 농지가격 하락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두 번째 “농어촌공사가 헌법정신을 위배하면서 지주역할을 하고 농지 임대업을 하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 살펴보자.
현상적으로 맞는 말로 들린다. 그러면 농어촌공사가 농지 관련한 거래 및 임대 관련한 과업에서 손을 떼고 온전히 시장에 농지 거래나 임대를 맡겨 놓을 때 농민의 이익이 증대하거나 농지 보유 형태가 경자유전의 원칙에 부합하게 조정될 것인가? 이는 완전히 어불성설이다. 농어촌공사가 농지공공임대/매입 과업을 수행하는 이유는 농민의 임대 부담을 줄이고 영농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농어촌공사가 이와 관련한 미션을 받은 것은 농지 소유주 까지를 포함해 임차농이 합의할 만한 적정수준의 임대료를 유지해 결과적으로 농민의 임대료 부담을 줄이고, 농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해 농민이 편안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보장하기 위해서다. 악역이라고 한다면 이 악역을 멈출 다른 정책적 대안을 제시해야한다. 그 대안은 비농민 소유 농지를 유무상으로 몰수해 실경작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 말고 무엇이 있을까? 그런데 그 방안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안이라고 기대할 순 없다.
 
세 번째 “공익형직불금을 농지 임대료 상승분으로 흡수해 농어촌공사만 배불리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 살펴보자.
이 부분은 뼈 아픈 지적이다. 농어촌공사는 직불금 수령 농지에 대한 적정한 임대료를 받고 있고, 직불금을 수령하지 않는 농지에 대해 이를 할인해 줘 왔다. 이 주장이 진실에 부합할 수 있지만 현상적으로 보면 직불금미수령 농지가 직불금을 받게 되면서 받게 되는 금액의 일정액을 임대료로 농지은행에 내게 된다. 당연히 직불금이 농어촌공사를 위한 것이냐는 비난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 정책 목적과 현장 정서와의 괴리를 면밀히 살펴 제도를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한 정책당국, 농어촌공사의 과오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직불금 미수령 농지가 직불금을 수령하게 될 때도 이전처럼 직불금 미수령농지 요율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농민에게 이익이 되고 정의로울까? 기존 직불금 수령 농가의 반발을 어떻게 할까? 당연히 마땅한 답이 없다. 단지 몇 년 유예를 통해 직불금 미수령기간동안의 손해를 회복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제기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안이 하나 있다. 소작농을 금하는 경자유전의 헌법정신에 맞게 농지 임대료를 폐지하는 것이다. 첫 단계로 농지 임대 수수료를 폐지하자. 솔직히 농지은행이 받는 임대료의 5%에 해당하는 수수료는 경영적으로 의미 없는 금액이다. 이를 수령하고 관리하는 행정비용이 5%의 수수료보다 적지 않다. 농민(혹은 농지소유주)에겐 부담이지만 농어촌공사에는 별로 이익이 되지 않은 수수료를 폐지하고 일부 행정비용을 정부재원에서 달리 조달하는 것은 합리적 대안이 될 수 있다.
나아가 농지 임대료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다. 한꺼번에 전체 농지의 임대료를 폐지하는 것이 무리가 있다면 우선 농어촌공사의 농지은행 보유분(공공보유분)의 임대료부터 폐지하고, 다음 단계로 농지 소유주가 받아야할 임대료를 국가가 대신 내어주면 정책 도입에 따른 충격과 제원 부담을 분산해서 농지임대료 폐지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렇게만 한다면, 농지임대차는 유지되지만 임대료가 없으니 소작행위를 막아 농민의 부담을 막고 영농안정성을 보장하자는 경자유전의 헌법취지에 부합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문제는 재원일 수 있는데 간척지를 포함한 공적 소유의 농지에 작목 선택에 제한을 두어 쌀 재배를 막고 콩, 옥수수, 밀 등 절대 부족 작물재배로 강제한다면 쌀 과잉생산으로 유발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어 임대료 재원에 충당하고도 남아 농토의 공공적 보유량을 늘이는 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청년농과 창업농의 진입과 영농확대를 도우면서 기존 농민의 영농안정성을 보장하기위해 국가는 농지의 공적 보유량을 늘여야한다. 그리고 이 과업을 농어촌공사/농지은행이 수행하는 것은 가장 합리적 선택이다. 그러나 헌법정신에 어긋나는 현실의 농지 소유와 임대 관행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를 궁극적으로 폐지해서 농민이 임대료 없이 온전히 자신이 농지로부터 거두어들인 땀의 결과에 대해 소유권을 행사하고 농지 소유와 무관하게 안정적으로 농사를 짓는데 기여해야 한다. 수수료와 임대료 없는 농지의 경작권은 농민을 윤택하게 하고 나아가 우리 사회에 건강한 먹거리를 더욱 안정적으로 공급하게 할 것이다.
아침부터 무리한 상상을 해 보지만 전문가의 구체적 연구를 기대해 본다.

202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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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덤으로 얻은 휴가

3일간의 투발루 현지 출장을 마무리하고 도착한 수바공항은 벌써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공항 이미그레이션 직원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고 쉽게 입국 절차를 진행해 주었다. 공항에서 나와 다시 The Grace Road Kitchen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동행했던 일부 민간업체 분들과 작별을 고했다. 그분들은 제일 먼저 난디와 시드니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는 귀국길에 올랐고 나와 다른 한명은 다음날 그리고 나머지는 2~3일 더 피지에서 업무를 진행하고 귀국길에 오를 예정이었다. 떠날 분은 떠나고 아직 업무가 남은 6명만 노보텔 수바 라미 베이에 짐을 풀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나니 투발루에서 진행된 협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이제 다 끝났다는 안도감이 지친 몸과 마음에 엄습했다. 편안한 마음에 호텔 풀장에서 몸을 적시고 밀린 빨래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67일 수바를 떠나기 전 반나절의 여유를 누리기 위해 부지런히 수바 시내를 돌아다닐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섰다. 첫 목적지로 수바박물관을 선택했다. 박물관을 이루는 정원과 열대 정원수들은 화려했지만 박물관 전시물들은 비교적 소박했다. 그렇지만 시간 내어 방문할 가치는 충분해 수바 여행객이라며 적어도 빼먹지 말고 꼭 방문해야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어딘가 익숙한 차림의 일군의 사람들이 관람을 하고 있었고, 물어보니 한국 대사 일행이었다.

박물관이 최근 보수 뒤 재개장해서 대사의 축하 방문이 진행되고 있는 시간대에 절묘하게 우리가 조우하게 된 셈이었다. 대사 일행의 관람이 마무리되기를 기다렸다가 별도의 공간에서 투발루 사업의 진행사항을 공유하고 향후 진행될 착공식에 초청을 드렸다. 대사게서 흔쾌히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전체 사업과정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결국 비행기 결항으로 일정이 늘어나면서 일정을 잡을 수 없었던 핵심적인 협의 상대였던 투발루 수산통상부장관과 피지한국대사를 모두 만나 협의 성과를 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세상사가 잠 오묘했다.

대사와 작별뒤 피지 대통령궁과 대법원 등 시내 주요 명소를 주유하고 중심 쇼핑가를 돌아다녔다. 피지 고유 의상인 술루(남자치마)와 하와이안 셔츠를 사서 입고 피지 사람이 다 된양 즐거운 오후시간을 보내며 출장의 긴장을 다 날려 버렸다. 하지만 수바의 날씨는 도착날부터 떠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 비가 내렸다. 어쩌면 그래서 더위가 덜해 돌아다니기엔 좋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바 시내 투어에 정신이 없다가 호텔로 돌아와 급히 짐을 싸고 Nausori공항을 향해 가는 길은 퇴근시간 체증으로 모두를 초조하게 했다. 겨우 체크인 시간에 맞춰 공항에 도착하고 같이 했던 동료들과 작별하고 우리 일행 두명은 난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난디에 도착하니 저녁늦은 시간이라 급히 난디공항에서 멀지않은 Nalagi Hotel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고 역시 비가 내리는 옥상에서 칵테일을 한잔 하며 피지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했다.

68일 새벽 6시에 조식을 하고 7시에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를 타니, 우리가 탄 비행기는 정확히 9시 20분에 시드니를 향해 이륙했다. 시드니 공항에 도착해서 전에 묵었던 Central Studio Sydney Hotel 로 가는 길에 작은 식물원 같은 가족 레스토랑인 The Grounds of Alexandria에 들러 버거로 점심을 대신했다. 다음날 새벽에 인천행 비행기가 있으니 이날 오후가 자유시간으로 주어졌고 우리는 이 시간을 최대한 만끽하기 위해 서둘렀다. 사실 조금은 피곤에 지쳐 그냥 호텔에서 쉴까하는 선택지를 두고 한참 고민하기도 했지만 과감히 박차고 호텔 체크인을 하자 마자 바로 시드니의 거리로 나섰다.

말로만 듣고 유투브에서만 보던 시드니 트램을 타고 Circular Quay에 도착, 바로 패리를 타고 Manly Wharf까지 달리며 나는 시드니항의 바람을 맞고, 바다향기에 취해 멀리 아름다운 도시 시드니에 빠져들었다. 나도 모르게 옆에 아내와 딸이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Manly Wharf에 내려 Manly Art Gallery & Museum을 방문하고, 다시 Manly Beach까지 걸어 젊은이들이 서핑을 하는 해변에서 모레를 밟으며 멀리 남태평양의 수평선을 바라다보았다. 가까이 만리비치가 보이는 Starbucks에서 커피를 마시고 다시 패리를 타러 돌아가는 길에 Coles Manly Corso라는 수퍼에 들러 이러저런 선물용 잡동사니를 쇼핑했다.

이번 시드니 방문에서 인상깊었던 한 장면으로  Manly로 가는 패리에 휘날리던  LGBT깃발과 그 너머 하버브릿지에 걸린 원주민 깃발이 호주 국기와 나란히 걸린 모습을 기록에 남기고 싶다. 사실 Aborgine이라는 호주 원주민은 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오리족보다 훨씬 가혹한 인종말살 정책의 대상이었다. 19세기까진 거의 말살 정책의 대상이 되다가 20세기 들어와 전쟁 등 필요성에 의해  통합정책이 펼쳐지고 원주민 어린이 10만명 이상이 강제로 탈취되어 백인 가정에 강제입양되어 백인 종교와 문화를 강제주입하는 야만적 역사가  진행되었다. 그 과오를 외면하던 호주정부는 21세기 들어와 겨우 잘못을 시인하고 일부 보상을 실시했다. 그러다보니 이웃 유질랜드 원주민은 인구의 약 9%가량을 차지하지만 호주원주민의 고작 3.3%에 머물고 있다. 많이 늦었지만 성적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보호 그리고 소수민족에 대한 동등한 대우를  표방하게 된것은 상징적인 역사적 진전이 아닐 수 없다.  

Circular Quay로 돌아가는 배는 고속 패리를 선택했지만 속도에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았고, 마침 해가 지는 시간이라 멋진 노을에 젖어들 수 있어 좋았다. 항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여객선터미널을 중심으로 시드니 항 일대 전체가 “2023 VIVID SYDNEY”라는 빛의 축제가 진행되고 있어 그야말로 축제의 중심으로 우리는 빨려즐어갔다. 라멘집에 들러 저녁을 먹고 오페라하우스 앞에 있는 Opera Bar에 들러 축제를 즐기는 인파에 묻혀 맥주를 한잔 하는 것으로 시드니의 밤을, 열하루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했다.

69일 새벽 5시에 호텔을 나와 시드니공항에 도착,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10여시간의 비행동안 두편의 영화를 보고 지난 출장길을 회상하고 정리했다. 걱정 았던 출장이 꿈같은 추억을 남기고 끝났다.

 

6. 투발루 출장이 남긴 3가지 기억

화폐단위가 510이 아니고 7달러짜리라니??? 인구 90만의 작은 나라 피지가 유독 럭비에서만은 세계 정상인데 2016년 리오에 이어 2020년 도쿄올림필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한 것을 기념해 발행한 화폐가 있다. 7은 행운의 7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7명이 뛰는 7인 럭비에서 금메달을 딴 걸 기념해서 7달러가 되었다고한다. 그 귀한 피지7달러 화폐를 기념품으로 선물 받았고 귀국후에도 많은 분들에게 선물로 나눠줄 수 있었다.

피지 수바에서 투발루 푸나후티 공항을 들어갈 때는 전 산출력된 항공권을 받았는데 다시 나올 때는 수기로 작성된 항공권을 받았다. 평생 처음 받아본 수기 항공권이다. 업무차 만난 투발루 공직자에게 나의 명함을 드리고 나서 기다렸지만 자기들은 명함이 없다며 주지 않았다. 들어보니 인구 만명인 투발루에는 인쇄 기계가 없어 명함을 만들 수 없다고 했다.

투발루 푸나푸티 라군호텔에 머물 때 하루는 오후 정부 협의를 끝내고 들어와 덥고 피곤한 탓에 잠시 침대에 누워있는데 살포시 호텔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인기척이 나더니 눈을 떠니 10살이 안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내보다 더 놀래 후닥닥 도망가는 아이를 따라 나갔다가 잡지는 않고 호텔 로비에 이야기만 해 주었다. 야간에 3명의 가드가 호텔을 경비한다고 하더니 대낮에도 호텔에 좀도둑이 들었다.

 

7. 마무리 그리고 새로운 시작

이번 일정을 함께 한 진용은 참 다양한 분으로 구성되었다. 해수부를 중심으로 농어촌공사가 전체 실무를 주도하고 원양산업협회, 해외수산협력센타, 연안항만() 15분이 같이 했다. 건축, 해양토목, 전기, 기계 전문가 등 20대 청년부터 60대 장년 까지, 정부와 준정부기관 구성원에서 민간인까지, 토목에서 통역까지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어떤 마찰이나 불협화음 없이 함께 돌보며 즐겁게 일정을 수행한 결과 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

투발루 정부와 공식협의가 있던 날이 나의 61번째 생일이었고, 협의를 마친 저녁 만찬 자리에서 생일서프라이즈를 준비해 준 직원들 덕분에 투발루 수산통상부 Kitiona Tausi 장관부부와 차관, Sam Finikaso 수산청장이 함께 불러주는 투발루 축가를 듣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고 고조된 분위기에 힘입어 부산 엑스포 지지를 요청하고 우호적인 의사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

아름다운 섬나라 투발루 출장길은 신비로운 라군으로 이루어진 남태평양 섬나라를 구경하는 행복한 경험을 얻고, 피지와 시드니에서도 다시 누리기 힘든 경험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모든 과정에서 전체 실무를 이끈 농어촌공사 직원의 헌신과 열정에 탐복 했고, 전체 일정에서 업무 균형을 잡아주고 우호적인 내부 분위기를 이끌어준 해수부의 역할에 감사했다. 출장길에 같이 오르진 않았지만 한국에서 업무 지원한 직원들의 노고도 잊을 수가 없다. 기대이상의 성과와 더불어 참 값지고 고마운 출장길이었다. 올해 10월 성대한 착공식이자 투발루 국민축제를 시작으로 큰 성과 있는 사업 마무리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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